항목 ID | GC04204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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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應恊 |
영어음역 | Min Eunghyeop |
이칭/별칭 | 인보(寅甫),명고(鳴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지현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인보(寅甫), 호는 명고(鳴皐). 아버지는 봉정대부 품계를 받은 민영(閔韺)이다.
[활동 사항]
민응협(閔應恊)[1597~1663]은 1633년(인조 11) 문과에 급제하여 1634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임금이 청에 항복하여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중국 심양에 인질로 잡혀갈 때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서 동행하였다가 이듬해 문안관(問安官)으로 귀국하였다. 1644년(인조 22) 5월 접위관으로 동래에 파견되어 왜의 사신을 접대하였고, 1646년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따르면, 민응협은 1646년 10월 동래에 부임하였고 1648년 11월 다대포 첨사가 왜인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도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의하면 왜인들이 “왜관이 좁으니 담장을 뒤로 밀어서 다시 쌓게 해 달라”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민응협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관을 개수할 때 다시 한 번 청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왜인들이 앙심을 품고 왜관 개수 공사 감독하던 다대포 첨사 조광원(趙光瑗)이 지형을 살피기 위해 왜관에 들어오자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며 구타를 하였다.
왜인의 소행을 보고 받은 인조(仁祖)는 크게 노하여 훈도(訓導)와 별차(別差)는 잡아들이고, 조광원은 죄로 다스리며, 왜인을 상대로 하는 시장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에도[江戶]에 사신을 보내려고까지 하였다. 하지만 쓰시마[對馬]의 도주(島主)가 물의를 일으킨 왜인을 잡아서 보내고, 사신을 파견해 용서를 빌자 인조는 강경책을 거두었다. 민응협은 이 일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안변 부사로 옮겼다가 경상 감사를 거쳐 중앙에 복귀하였다. 1663년(현종 4) 사헌부 대사헌을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묘소]
민응협의 묘는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2년(숙종 18) 민응협의 후손들이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의 묘역에 신도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