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권대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56
한자 權大載
영어음역 Gwon Daejae
이칭/별칭 중거(仲車),소천(蘇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순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
대표관직 동래 부사|홍문관 제학
출생 시기/일시 1620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6년 -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53년 - 별시 문과 을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58년 - 문과 중시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60년 - 전라도 도사에 임명,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66년 - 공산 판관에 임명,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74년 6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4년 8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79년 - 종성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9년 - 홍문관 제학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89년연표보기 - 사망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 할아버지는 예조 판서 권협(權悏)이고, 아버지는 진사 권위중(權偉中)이다.

[활동 사항]

권대재(權大載)[1620~1689]는 1658년(효종 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창평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전라도 도사일 때 과거 시관(試官)으로서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파직되었고, 1666년(현종 7) 공산 판관(公山判官) 때는 소송을 건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권대재의 정치적 경향은 남인 계열로,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에 속하였다.

두 차례의 예송 논쟁(禮訟論爭) 후 남인이 집권하자, 승지·영남 순무사·사간원 대사간·사헌부 대사헌·예조 참판 등을 거치면서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宋時烈)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679년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고, 그해 10월 전라 감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여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권력을 잡아 홍문관 제학으로 복관하였다.

1674년 6월 동래 부사로 부임했다가 8월에 왜관의 우두머리인 관수(館守)와 숙배(肅拜)[절을 올림] 논란을 일으켜 파직되었다. 당시 권대재가 올린 장계에 숙배 논란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당시 관수가 진상 숙배(進上肅拜)[귀한 물건을 임금이나 고관에게 바치고 절을 함]를 할 때 동래 부사와 부산진 첨사는 대청 위 동쪽 벽에 서고, 역관인 훈도(訓導)와 별차(別差)는 서쪽 벽에 서는 것이 관례였다. 이를 보고 관수가 말하기를 “일본에서 건너온 사신이 뜰 가운데서 절을 하는데, 역관이 대청에 서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역관이 내려와야만 절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조선 측은 역관이 대청에 서는 것은 어전통사(御前通事)의 예를 갖추는 행위이고, 60여 년 동안 행해 온 규례이므로 바꿀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논란으로 권대재는 부산 첨사 및 담당 역관과 함께 처벌을 받아 파직당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독역수차(讀易手箚)』, 『중용변의(中庸辨疑)』, 『사림평요(士林評要)』, 『남위록(南爲錄)』, 『광산록(光山錄)』, 『용문록(龍門錄)』, 『초산록(草山錄)』 등이 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