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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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允謙 |
영어음역 | O Yungyeom |
이칭/별칭 | 여익(汝益),추탄(楸灘),토당(土塘),충간(忠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지현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토당(土塘).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다.
[활동 사항]
오윤겸(吳允謙)[1559~1636]은 1589년(선조 22) 성균관 유생으로 전강(殿講)에서 으뜸을 하여 영릉 참봉에 임명되었다. 평강 현감이던 1597년(선조 30)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이조 좌랑·지제교·부교리를 역임하였다. 1602년(선조 35) 스승 성혼(成渾)을 변호한 것이 문제되어 경성 판관으로 좌천되었다. 1609년(광해군 1)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따르면 오윤겸은 1609년 7월에 부임하여 이듬해 9월 부모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였다고 한다. 같은 해 경상도 안무사에 임명되었다.
오윤겸은 호조 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지내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가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617년(광해군 9) 회답 겸 쇄환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왔다. 오윤겸이 지은 『동사일록(東槎日錄)』에 따르면 1617년 7월 5일 해신제를 지내고 8일 일본으로 출발했으며, 10월 18일 부산에 돌아왔다.
1618년(광해군 10) 조정에서 인목 대비(仁穆大妃)[영창 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를 폐하자는 논의가 일자 이를 반대하였다가 탄핵당했다. 1622년(광해군 14) 명나라 희종(熙宗)의 등극을 축하하는 하등극사(賀登極使)에 뽑혀 바닷길을 통해 중국에 다녀왔다. 1623년(인조 즉위년) 인조반정 후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仁祖)를 공주로 호종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왕비와 후궁들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1628년 영의정에 올랐다. 1636년 78세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해동 18현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의 문인으로, 문집 『추탄 선생집(湫灘先生集)』이 있다. 회답 겸 쇄환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쓴 『동사일록』과 명나라 사행 기록인 『해사조천일록(海槎朝天日錄)』을 남겼다.
[묘소]
오윤겸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63년(현종 4) 충간(忠簡) 시호를 받았다. 경기도 광주의 구암서원(龜巖書院)[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산 132]에 배향되었다. 서원은 현재 터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