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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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敬命 |
영어음역 | Go Gyeongmyeong |
이칭/별칭 | 이순(而順),제봉(霽峯),태헌(苔軒),충렬(忠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제장명 |
[정의]
조선 전기 동래 부사 출신으로 의병장을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증조 할아버지는 고자검(高自儉)이고, 할아버지는 형조 좌랑 고운(高雲)이며, 아버지는 사간원 대사간 고맹영(高孟英)이다. 어머니는 진사 서걸(徐傑)의 딸이다. 아들은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고유후(髙由厚), 고용후(高用厚)이다.
[활동 사항]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1533년(중종 28) 11월 30일 광주 압보촌에서 출생하였다. 20세 되던 1552년(명종 7)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 1558년(명종 13)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곧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같은 해 호조 좌랑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형조 좌랑, 사간원 정언을 지내고 1561년(명종 16) 사간원 헌납,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한 뒤 1563년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그해 울산 군수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후 파직당했다. 그러자 고경명은 고향으로 내려가 산수를 즐기고 학문을 닦으면서 19년 동안 은거하였다.
1581년(선조 14)에 다시 영암 군수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계 변무사로 가는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서산 군수로 나갔다가 그해 가을 명나라 사신 황홍헌(黃洪憲)이 오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천거로 접반사가 되었다. 1584년(선조 17) 종부시 첨정, 사복시 첨정을 거쳐 겨울에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 이듬해 군자감 정에 이어 순창 군수로 내려갔다. 1588년(선조 21) 순창 군수를 사임하고 1590년 내첨사 정이 되었다가 승문원 판교로 옮겨 지제교를 겸했다. 다시 문한직을 맡아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의 녹훈교서(錄勳敎書)를 지어 올리고, 그해 겨울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고경명은 1590년 2월부터 1591년 6월까지 동래 부사로 재임하였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사 종사관으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광국공신에 녹훈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고경명의 문적에 따르면 동래 부사로서 “염백자지 이민시열(廉白自持吏民是悅)[스스로 청렴하고 결백한 가운데 백성을 다스리니 즐겁다]”라고 하였고,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1537~1616]가 지은 신도비문에도 “여러 군부를 맡아 다스렸지만 집안에 재물이 없어서 죽었을 때 치장할 돈이 없었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래부를 잘못 다스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탄핵으로 파직당한 것은 서인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천거했기 때문에 서인 실각 후 그 불똥이 고경명에게 튄 것으로 보인다.
고경명은 파직 후 고향인 광주로 돌아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큰아들 고종후와 둘째 아들 고인후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전라 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여러 곳에서 공을 세웠다. 고종후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고, 고인후는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서 싸우다가 고경명과 함께 순절하였다.
[학문과 저술]
고경명 부자의 충절을 기록한 『정기록(正氣錄)』이 있다. 고경명의 셋째 아들 고유후가 편찬하고, 막내아들 고용후가 증보 간행했다. 격서 7편, 통문 3편, 편지 6편, 기타 복수문과 별지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봉집(霽峯集)』은 고경명의 시문집으로 1617년(광해군 9) 고용후가 간행하였다. 『유서석록(遊瑞石錄)』은 고경명이 광주 무등산(無等山)[瑞石山]을 돌아보고 쓴 견문록으로 목판본 1책이다. 『고제봉 유서석록(高霽峰遊瑞石錄)』이라고도 한다. 고경명이 1574년(선조 7) 4월 20일부터 5일간 광주 목사 임훈(林薰) 등과 무등산에서 유락(遊樂)할 때 산중의 경승(景勝), 산사(山寺)의 연혁, 유적 등을 보고들은 대로 기록한 글이다. 발간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631년(인조 9) 서광계(徐光啓)가 쓴 발문이 있다.
[묘소]
고경명의 묘는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430-2번지 오동촌에 있다. 원래 전라남도 화순에 있던 것을 1609년(광해군 1) 장성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594년(선조 27) 왕세자의 사제를 받고, 이듬해 고경명·고종후·고인후 삼부자에게 정려가 내려졌다. 이때 임금이 특별히 부조를 보냈다. 고경명 삼부자는 1601년(선조 34) 광주에 세워진 포충사에 유팽로(柳彭老), 안영(安榮)과 함께 배향되었다. 포충사는 1603년(선조 36) 사액을 받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고경명의 묘지 인근에 윤근수가 글을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1617년(광해군 9) 금산 성곡서원, 1632년(인조 10) 금산 종용사에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함께 모셔졌다. 1635년(인조 13) 충렬(忠烈) 시호를 받았고, 1687년(숙종 13) 순창 화산서원에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