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02 |
---|---|
한자 | 具守萬 |
영어음역 | Gu Suman |
이칭/별칭 | 구자광(具滋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청광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구영필(具永弼)이고, 어머니는 김수련(金秀連)이다. 아버지는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였다. 본적은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가곡리이다. 다른 이름은 구자광(具滋光)이다.
[활동 사항]
구수만(具守萬)[1908~1976]은 1908년 3월 22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청광리에서 구영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0년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 서울 지역 학생 운동에 가담하였다.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 학생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12월 서울 지역에서도 대대적인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막기 위해 12월에 학교들이 조기 방학을 하여 시위는 잠시 소강상태였다. 그러나 1월 개학을 하면서 다시 시위가 준비되었다.
구수만은 정황학(鄭黃鶴) 등과 배재고등보통학교의 시위를 준비하였다. 1월 15일 항일 격문을 전교생에게 배포하고 대오를 짜 교내에서 가두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경찰들의 저지와 엄중한 감시로 실패하였다. 1월 17일에도 배재고등보통학교생 600여 명이 궐기하여 교정에서 격문을 뿌리고 깃발을 흔들고 시위를 하였다. 이 학생 운동의 주도자로 지목을 받아 보안법 위반으로 잡혔다가 1930년 2월 불구속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다. 경기도 경찰부장이 보낸 6월 9일자 경고비(京高秘) 제4527호 서류에 의하면 이 사건으로 무기정학 처분을 당하였다.
그 후 부산으로 내려와 조선 공산당 재건을 위해 독서회, 문예회, 토론회 등 모임을 이끌었다. 노동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인쇄 직공으로 일하다 여러 차례 검속되어 퇴직을 당한 후 다시 가등정미소에 근무하면서 노동 운동 조직을 강화하려고 힘썼다. 조선공산당 재건투쟁협의회에서 부산 지역 세포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영남 책임자인 송연수(宋演壽)와 밀양 책임자인 길또술[吉且述]과 만나 각 공장을 중심으로 세포 조직을 건설하는 등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1933년 1월 4일 부산진 일영고무공장 부근에서 송연수·길또술·조임순 등과 만나 몰래 회의하는 현장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구수만을 포함한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현장에서 달아난 길또술이 마산에서 잡히면서 2월 24일부터 조선 공산당 재건 단체의 전국적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경성으로 압송되었으며 수사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재판조차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1933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불기소 처분되었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76년 6월 30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