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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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禧老 |
영어음역 | Gwon Huiro |
이칭/별칭 | 김희로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병윤 |
[정의]
1968년 민족 차별에 항거하여 일본인 조직 폭력배를 살해하고 복역 후 부산으로 귀국한 재일 한국인.
[가계]
권희로(權禧老)는 1928년 11월 20일 일본 시즈오카 현[靜岡縣]에서 목재 하역부인 아버지 권명술과 어머니 박득숙의 큰아들로 태어난 재일 한국인 2세이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김희로’로 바꿨다. 귀국과 함께 다시 이름을 ‘권희로’로 바꾸었다.
[활동 사항]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일본에서 권희로는 가출과 퇴학, 소년원 입소라는 격정의 성장기를 지냈다. 1959년 지바형무소[千葉刑務所]에서 출소한 그는 결혼을 하고 술집도 차리지만, 술집 경영에 실패한 데 이어 손댔던 사업들도 잇따라 망하자 항만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1968년 2월 20일 권희로는 시즈오카 현 시미즈 시[靜岡縣 淸水市]에서 일본인 조직 폭력배인 야쿠자 2명과 말싸움을 하게 되었다. ‘김희로’를 세상에 알린 사건의 발단이었다. 채권 청부를 받아 빚 독촉을 하던 일본인 야쿠자가 “조센진, 더러운 돼지 새끼!”라고 모욕을 하자 이에 격분한 권희로는 총으로 이들을 살해하였다. 그러고는 다이너마이트와 실탄을 가지고 현장을 빠져나와 45㎞ 떨어진 하이바라 군[榛原郡]으로 도주한 후 그곳의 한 온천 여관에서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일본 경찰과 대치하였다.
당시 생중계된 기자 회견에서 권희로는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라고 주장하였다. 기자로 변장한 형사들에게 체포당한 권희로에게 그 어머니는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며 흰 한복을 전하였다고 한다. 권희로는 3심을 거쳐 1975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무기 징역이 확정돼 구마모토형무소[熊本縣刑務所]에서 복역하였다.
오랜 석방 운동 끝에 권희로는 1999년 9월 7일 일본에 다시 입국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가석방돼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권희로의 석방과 귀국에는 부산 자비사 주지 승려인 박삼중의 역할이 컸다. 당시 그는 국내 언론을 통해 재일 한국인 차별에 맞선 사람으로 알려졌다. 2000년 4월 제16대 총선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첫 주권 행사도 하였다.
그러나 2000년 한 해 동안 그에게는 좋지 못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4월에는 1979년 옥중 결혼을 하였던 돈 모 여인이 돈을 들고 집을 나가자 돈씨를 수배 요청하였다. 9월에는 내연 관계에 있던 박 모 여인이 사는 집에 흉기를 들고 들어가 난동을 부리고 불을 지른 혐의로 구속됐다가 성격 장애 판정을 받고 공주보호감호소에 수감되었다. 그 뒤 남편과 이혼한 박씨와 결혼하였으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2006년께부터는 어렸을 적 일본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70대의 이씨와 살았다. 2010년 3월 26일 전립선암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수기집 『너는 너. 나는 나』[1968],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1999]를 남겼다.
[묘소]
부산 영락공원 장례식장에서 화장한 뒤 유골의 반은 영도 앞바다에 뿌리고, 반은 일본 시즈오카 현 가케가와 시[靜岡縣 掛川市]에 있는 어머니 묘소 옆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