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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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以酊庵輪番制 |
영어의미역 | Ijeongam Yunbeonj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성일 |
[정의]
조선 후기 일본 막부가 조선과 주고받는 외교 문서를 통제하기 위하여 시행한 제도.
[제정 경위 및 목적]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조선과의 외교 및 무역 업무를 대마도(對馬島) 즉 쓰시마 번[對馬藩]이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정암(以酊庵)은 교토(京都)에서 대마도로 파견된 승려들이 머물던 절이었다. 이정암은 1580년(선조 13) 일본 하카타(博多) 세이후쿠지[聖福寺] 승려인 현소(玄蘇)[겐소], 호는 게이테츠(景轍)]가 소씨가[宗家, 소케] 제17대 소 요시시게[宗義調][1532~1588]의 초빙을 받아 대마도로 건너가 지은 선사(禪寺)를 말한다. 현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을 받아 일본이 조선 국왕과 주고받는 외교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의 제자인 현방(玄方)[겐포, 호는 기하쿠(規伯)]이 제2대 이정암이 되어 그의 뒤를 이었다.
그런데 1635년(인조 13)에 일본에서 야나가와 사건[柳川一件]이라 불리는 국서 위조 사건(國書僞造事件)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해 3월 11일 에도 성[江戶城]에서 제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시 대마 도주 소 요시나리[宗義成]와 그의 가신(家臣)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사이의 구두 변론이 펼쳐졌다. 최종적으로 막부는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대마 도주 소 요시나리에게는 무죄를,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는 쓰가루[津軽]로 유배형을, 그리고 당시 이정암 암주(庵主)이던 현방에게는 국서 위조에 간여하였다는 죄목으로 난베[南部]로 유배를 보내는 조치를 내렸다.
일본의 막부는 야나가와 사건이 있은 뒤부터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는 외교 문서에 개입하여 통제를 하기 시작하였다. 즉 이전까지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의 충돌을 막기 위하여, 때로는 대마도 자체의 이익을 위하여 두 나라의 국서를 막부 몰래 고쳐 쓰던 관행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막부는 교토의 승려들이 2년 임기로 돌아가면서 대마도로 가서 대마도가 조선과 주고받는 외교 문서의 초안을 작성하게 하고, 두 나라 사이에 오간 외교 문서를 관리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막부에 보고하게 하는 틀을 갖춘 것이다.
[관련 기록]
이정암의 윤번승(輪番僧)이 남긴 기록으로는 조선과 일본의 대마도가 주고받은 외교 문서인 서계(書契)를 필사한 『본방 조선 왕복서(本邦朝鮮往復書)』[국사편찬위원회 소장]와 『양국 왕복 서등(兩國往復書謄)』[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등이 있다.
[내용]
야나가와 사건으로 제2대 이정암 주지인 현방이 물러나자 대마도는 갑자기 외교 공백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조선에 보낼 외교 문서를 한문으로 작성하는 일을 맡을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마도는 외교 문서를 관장할 만한 사람을 파견해 줄 것을 막부에 요청하였다. 그렇게 하여 1635년 9월 동복사(東福寺[도후쿠지] 옥봉(玉峯) 광린(光璘)이 당분간 그 일을 맡기로 하여 10월 23일 이정암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이정암 윤번제(以酊庵輪番制)가 시작된 셈이다.
그가 바로 초대 이정암 윤번승(以町庵輪番僧)인데, 이정암 주지(住持)로는 제3대에 해당한다. 1636년(인조 14) 그 뒤 제2대 이정암 윤번승[제4대 주지]으로 동복사 당음(棠蔭) 현소가 부임하였다. 1638년(인조 16) 제3대 이정암 윤번승[제5대 주지]은 천룡사(天龍寺)[텐류지] 동숙(洞叔) 수선(壽仙)이 맡았다.
그런데 제7대까지 광린·현소·수선이 번갈아 가면서 이정암 윤번승의 자리를 지켰다. 교토 오산(京都五山) 승려들이 윤번(輪番)으로 대마도 이정암에 파견된 때는 1643년(인조 21) 이후의 일이다. 이것을 보면 이정암 윤번제가 시작된 이유는 막부의 대마도 통제책의 일환이었다기보다는 대마도가 조선과 주고받을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데 실무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변천]
에도[현 도쿄]에서 이정암 윤번제 폐지 명령을 내린 때는 게이오[慶應] 2년[1866] 12월 20일이었다. 이것이 대마도에 전달된 때는 해를 넘겨 게이오 3년[1867] 1월 29일이었다. 마지막 윤번승이 이정암을 떠난 때는 그해 3월 3일이었다. 이로써 이정암 윤번제는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과 대마도 사이의 외교 교섭에 직접 개입하려고 이정암 윤번제를 시행하였던 막부의 의도가 실제 실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대마도가 조선에 보낼 서계를 한문으로 작성하는 이른바 진문(眞文)의 초안(草案)을 만든다거나, 조선에서 대마도로 보낸 서계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에 이정암 윤번승이 관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최종적인 권한은 주로 대마 도주가 행사하고 결정을 내렸다.
즉 대마도에서 조선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조선방(朝鮮方)[조센가타]의 진문역(眞文役)과 이정암 윤번승 사이에 서계의 내용을 둘러싸고 의견 대립이 있을 때는 대체로 대마 도주의 의견이 관철되곤 하였다. 따라서 이정암 윤번제를 시행함으로써 막부가 실제로 대마도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더 나아가 조선과 대마도 사이의 외교에 직접 개입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한편 이정암의 승려들은 조선에서 통신사(通信使)가 일본에 가게 되면 대마 도주와 동행하여 에도를 왕복하면서 통신사 접대를 맡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