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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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餠泰 |
영어음역 | Gim Byeongtae |
이칭/별칭 | 김빈(金斌),조국동(曺國棟)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58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병태(金餠泰)[1899~1946]는 1899년 1월 14일 부산진 좌천 마을[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581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정공단(鄭公壇) 옆에 있던 육영재(育英齋)에서 공부하였다. 일제의 무단 통치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항일 의식을 키워나갔고 육영재와 부산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의 학우인 박재혁(朴載赫), 최천택(崔天澤), 박홍규 등과 함께 구세단(救世團)을 결성하여 우리 역사를 공부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카야마현[岡山縣] 금광중학(金光中學)에 3년간 다녔다.
스무 살 때인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租界)에 살면서 민족 해방 운동에 투신하였다. 구세단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1919년 일제 고관의 암살과 주요 관공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의열단의 첫 성공 거사인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에서 박재혁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1927년 2월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정치과에 입학하여 의열단 무한지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28년 2월 의열단원 9명과 함께 일본영사관 경찰과 무한공안국에 체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석방 탄원서에 의해 6개월 만에 석방된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원조를 받아 1932년에 창설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관으로 조선 청년들을 교육하였으며 이 청년들이 후일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1934년 3월 1일 중국 난징[南京]에서 개최된 조선 대일 전선 제2차 대표자 대회에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여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36년 이후에는 의열단 김원봉의 비서와 민족혁명당 및 조선의용대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1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가하면서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1945년 3월 한국광복군의 인도 파견 공작에 참가할 요원으로 선출되었으나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조국의 독립을 맞이하였다. 해방 이후 귀국이 늦어지면서 상하이에서 민족혁명당 중앙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병으로 이국땅 난징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