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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704
한자 韓興敎
영어음역 Han Heunggy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0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서용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의료인|정치인
성별
대표경력 진보당 경남위원장
출생 시기/일시 1885년 11월 25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94년 - 동래공립소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897년 4월 - 개양학교를 거쳐 삼락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04년 3월 - 삼락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04년 4월 - 세이소쿠중학교 보습과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06년 4월 -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1년 10월 -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혁명군 군의관으로 많은 전투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11년 12월 - 신규식·조성환과 손문을 면담
활동 시기/일시 1911년 12월 - 상해적십자사 및 상해호군위무병원 의관 겸 군의 소령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항주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북경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동제사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한중호조사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14년 - 천동동제병원 개원
활동 시기/일시 1916년 3월 -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17년 5월 - 동래 대동병원 개원
활동 시기/일시 1917년 9월 - 다시 중국으로 출국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베이징 국립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베이징 경사전염병원의원 의관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중외통신사, 신광신보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열단의 베이징 주재 대표
활동 시기/일시 1925년 6월 - 기관지 『앞잡이』 발행
활동 시기/일시 1927년 6월 -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동래 대동병원 다시 개원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경오구락부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출국 후 베이징과 톈진 등지에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6년 5월 - 귀국 후 경상남도 도립마산병원장으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부산에서 한내과 개원
활동 시기/일시 1956년 - 진보당 경남위원장으로 선출
몰년 시기/일시 1967년 7월 1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건국 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출생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01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동래공립소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학교|수학지 개양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학교|수학지 삼락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학교|수학지 세이소쿠중학교 - 일본 도쿄
학교|수학지 오카야마의전 - 일본
활동지 중국혁명군 - 중국 난징
활동지 중화민국 상해적십자사 - 중국 상하이
활동지 항주의학전문학교 - 중국 항주
활동지 동제사 - 중국 상하이
활동지 한중호조사 - 중국 상하이
활동지 빈민 구제 진료소 - 중국 절강성 가흥
활동지 대동병원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지도보기
활동지 국립의학전문학교 - 중국 베이징
활동지 경사전염병원의원 - 중국 베이징
활동지 중외통신사 - 중국 베이징
활동지 신광신보사 - 중국 베이징
활동지 도립마산병원 - 경상남도 마산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의료인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

[가계]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한규용(韓奎容)으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서 담뱃대 공장을 경영하였다. 16살에 두 살 연상인 이인옥(李仁玉)과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 한형석(韓亨錫)은 중국에서 항일 예술 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이다.

[활동 사항]

한흥교(韓興敎)[1885~1967]는 1885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01번지에서 한규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한학을 배웠고, 동래 지역 신학문의 진원지였던 개양학교삼락학교(三樂學校)[현 동래고등학교]에서 근대 학문을 배우면서 차츰 민족주의적 성향을 익히게 되었다. 삼락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스무 살이 되던 19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 보습과와 야간 영어 학교에 입학하였다. 1906년 세이소쿠중학교를 졸업하고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岡山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병든 사람을 구해내는 의술을 배우면 일본에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910년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출신 중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다.

1910년 조국이 일제에 강점당하자 나라 잃은 백성으로 사는 무기력함과 침략자 일본에서 공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1911년 10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의 혁명이 조선의 독립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고 상해적십자사 구호대에 들어간 후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국혁명군을 따라 군의관으로 소주(蘇州), 진강(鎭江) 등지의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후 적십자구호대장과 중국혁명군 3등 군의정(軍醫正)[지금의 소령 계급에 해당]에 임명되어 무창(武昌), 낙양(洛陽), 난징[南京] 등의 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12년에 항주의학전문학교(抗主醫學專門學校) 및 북경의학전문학교(北京醫學專門學校)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상하이로 돌아와 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과 함께 신채호(申采浩)·조소앙(趙素昻)·신석우(申錫雨)·박찬익(朴贊翊)·신익희(申翼熙)·장건상(張建相)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한흥교는 동제사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의료를 전담하였으며, 독립 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하였기에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중국인 동지 규합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914년 상하이에서 천동동제의원(天東同濟醫院)이라는 병원을 개업하였으나 중국 혁명의 여파로 얼마 못가 병원 문을 닫고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에서 빈민 구제 진료소를 운영하며 동제사와 한중호조사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1916년 3월 한흥교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으로 급히 귀국하였다. 하지만 이는 한흥교를 귀국시키려고 아버지가 꾸며낸 일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한흥교에게 아버지는 동래 제일의 부자 오종식(吳宗植)[전 서울신문사 사장]의 집[현 동래구청 옆 부산지방기상청 자리]에 병원을 차려 주었다. 1917년 개업한 대동병원(大同病院)은 지금의 동래 대동병원의 시초가 되는 병원으로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 속에 생활이 자유롭지 못하였던 한흥교는 결국 1년 6개월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신채호와 함께 베이징[北京]에서 중외통신사(中外通信社)와 신광신보사(晨光新報社)를 창립하고 중국 각지와 러시아, 미국 등 각국에 신문을 발송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25년 6월에는 베이징에서 원세훈과 함께 『앞잡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고 중국과 연합하여 항일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 한·중 연합으로 「타도 일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당시 한흥교는 국내외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들어오는 통신이나 서류의 전달을 담당하였으며, 두 아들을 통해 중국의 독립운동가와 국내의 안희제(安熙濟) 등과 연락하기도 하였다.

1927년 6월 아버지가 별세하여 다시 고국에 돌아온 한흥교는 1928년에 동래 대동병원을 다시 개업하여 운영하면서 1930년 동래 지역의 여론 기관으로 출현한 경오구락부(庚午俱樂部)에 참여하는 등 동래 지역에서 사회 운동을 하다가 만주 사변 이후인 1933년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베이징, 톈진[天津]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료 활동과 한중 연합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땅에서 해방을 맞이한 한흥교는 1946년 5월 귀국하여 경상남도 도립마산병원의 병원장으로 근무하다가 1948년 부산에서 한내과(韓內科)를 개업하였다. 이후 70대의 고령에도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며 진보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진보당 초대 경상남도위원장이 되었다. 1967년 7월 1일 노환으로 동래 자택에서 82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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