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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35
한자 崔鉉培
영어음역 Chae Hyeonbae
이칭/별칭 외솔
분야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285번길 22[칠산동 36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차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자|교육자
성별
본관 경주
대표관직|경력 연세대학교 교수|한글학회 이사장
출생 시기/일시 1894년 10월 19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6년 4월 - 연희전문학교 교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7년 - 『우리말본』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38년 9월 - 연희전문학교 해직
활동 시기/일시 1941년 5월 - 연희전문학교 복직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0월 1일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21일 - 미군정청 문화교육부 편수국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9년 9월 - 한글학회 이사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51년 1월 20일 - 문화교육부 편수국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연희대학교 부총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8년 -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2년 - 한글학회 부설 한글기계화연구소 개설
활동 시기/일시 1964년 3월 1일 - 동아대학교 강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70년 3월 23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0년 - 재단법인 외솔회 설립
추모 시기/일시 1971년 5월 15일 - 기념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90년 6월 1일 - 최현배 동상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94년 10월 31일 - 최현배 동상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8년 10월 2일 - 최현배 동상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10년 3월 23일 -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관 개관, 생가 복원
출생지 울산 -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 613
거주|이주지 부산 - 부산광역시 동래구지도보기
수학|강학지 울산일신학교 - 울산광역시 중구 서동 331
수학|강학지 경성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남동 369-1
수학|강학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 일본 히로시마현
수학|강학지 교토제국대학 - 일본 교토시 좌경구
활동지 동래고등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360지도보기
활동지 연희전문학교 - 서울시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
활동지 동아대학교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3가 1지도보기
활동지 한글학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1가 58-14
묘소|단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23-1
동상 연세대학교 - 서울시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
기념비 장충단 공원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2가 196
기념관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관 - 울산광역시 중구 복산동 180-1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국어학자이자 국어 운동가.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최병수(崔炳壽)이고, 어머니는 박순화(朴順和)이다. 부인은 이장련(李長連)이다.

[활동 사항]

최현배(崔鉉培)[1894~1970]는 1894년 10월 19일 경상남도 울산군 하산면 동리[현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 613번지]에서 태어났다. 울산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10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 주시경(周時經)의 국어 강습회에 참가하면서 한글에 흥미를 느껴 1913년 ‘조선어강습원’ 고등과에 진학, 1회로 졸업하였다. 1914년 여름방학 때 경상남도 동래군 동명학교(東明學校)[지금의 동래고등학교] ‘하기 강습소’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0년~1921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적당한 조선어 교재가 없어 직접 교재를 만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우리말 교과서를 쓰기 시작한 것이 『우리말본』의 초고이다.

1922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1925년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이듬해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 위원이 되었으며, 1933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참여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연희전문학교에서 해직되었다가 1941년 복직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1945년 8월 15일 광복될 때까지 3년간 복역하였다.

최현배는 광복 이후 국어학자, 국어 운동가, 교육 행정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미군정 시절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문화교육부 편수국장이 되어 교과서 행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49년에는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197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헌신하였다.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1955년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6·25 전쟁 당시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한글 타자기 경연 대회를 열었으며, 1957년에는 ‘한글타자기 자판 합리적 통일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한글 기계화에도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1년 연세대학교 명예 교수가 되었고, 1964~1966년에는 부산 동아대학교 문리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8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로 취임하였다. 1970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조선 민족 갱생의 도』[1926], 『중등 조선말본』[1934], 『우리말본』[1937], 『시골말 캐기 잡책』[1936], 『중등 교육 조선어법』[1936], 『한글의 바른 길』[1937], 『한글갈』[1940] 『한글갈』[1942], 『글자의 혁명』[1947], 『중등 말본』초급[1948], 『민주주의와 국민 도덕』[1953], 『한글의 투쟁』[1954], 『고등 말본』[1956], 『나라 사랑의 길』[1958], 『한글 바로 적기 공부』[1961], 『고친 한글갈』[1961], 『나라 건지는 교육』[1963], 『한글 가로글씨 독본』[1963], 『배달말과 한글의 승리』[1966] 등이 있다.

[묘소]

최현배의 묘소는 2009년 9월 23일 이장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제1회 대한민국 학술원 공로상[1955], 건국 공로 훈장[1962],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로 표창장[1962], 제2회 5·16 민족상 학예 부문 본상[1967]을 수상하였다. 1970년 유고집 『한글만 쓰기의 주장』이 나왔고 국민 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그해 최현배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기 위해 재단법인 외솔회가 출범하였으며, 2010년 생가가 복원되고,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관’이 개관하였다. 그 외 장충단 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울산남부도서관[1990], 연세대학교[1994], 병영초등학교[2008]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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