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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성곽과 관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31
한자 高麗時代-城郭-關防
영어의미역 Castles and border Defense in the Goryeo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이종봉

[정의]

고려 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부산 지역의 국방 시설.

[개설]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는 13~14세기에 고려 및 중국의 해안 지방과 섬들을 침범하고, 때로는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 노략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왜구는 1223년(고종 10) 금주[현 김해]의 침략을 시작으로 고종 대에 5차례 출몰하였고, 1350년(충정왕 2)에도 우리나라 해안 지역을 침탈하였는데, 왜구가 노리는 곳은 주로 남해안 연안과 곡창 지대, 조운선(漕運船)이 다니는 해로였다. 따라서 주요 약탈지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바닷가 지역이었고,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까지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도읍지 개경에서 가까운 승천부(昇天府)[현 경기도 개풍] 강화도 교동(喬桐), 예성강까지 올라와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왜구의 침입으로 개경에도 자주 경계령이 내려졌으며 도읍지를 옮기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위기의식이 팽배하였다. 왜구로 인해 남해안 연안은 토지가 황폐화되었고, 조운(漕運)이 멈추기도 하였다. 왜구의 침입로가 확대되면서 수로 및 해로의 통행이 어려워지자 조정에서는 조창(漕倉)[세곡의 수송과 보관을 위하여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창고]을 내륙 깊숙한 곳으로 옮기거나 폐쇄하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왜구의 규모는 작을 때는 배 20여 척, 많을 때는 400여 척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왜구 선단은 군사상 중요 지점인 합포 병영(合浦兵營)[합포는 지금의 마산]을 습격하거나 세곡을 실은 조운선을 탈취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단순한 해적질을 넘어선 단계였다. 왜구의 침략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은 고려는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어 체계의 구축]

고려 조정에서는 왜구를 토벌하고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군사 체제를 정비하였는데, 수군의 창설도 그런 노력 중 하나였다. 원의 간섭기에는 군사 요충지에 만호부(萬戶府)[왜구의 침입을 막고 치안을 맡아보던 관아]를 설치하였다. 고려·몽골 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실패한 직후인 1281년(충렬왕 7) 금주, 합포, 고성 등에 진변 만호부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만호부를 확대해 나갔다. 공민왕(恭愍王) 때는 왜구 침입을 감시하고 체포하기 위해 왜인 추포 만호(倭人追捕萬戶)라는 관직을 두기도 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전함을 건조하고 연해 각지에서 기선군(騎船軍)[수군]을 조직하여 그 안에 도만호(都萬戶), 만호(萬戶), 부만호(副萬戶) 등을 두었다. 1388년(우왕 14) 조준(趙浚) 등의 건의로 왜구 방어를 위한 수군만호부가 설치되었다. 왜구의 토벌과 침입을 막기 위한 노력은 남해안 일대의 수군 창설로 이어졌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기장에 두모포영(豆毛浦營)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설치 시기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고려 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제 개편]

왜구의 침입에 대한 또 다른 대응책은 군제 개편이었다. 1356년(공민왕 5) 군역 제도를 정비하여 지방의 농민층에게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1364년(공민왕 13) 각 도의 농민 2만 7000명을 선발, 중앙의 2군 6위를 보조하여 돌아가면서 숙직을 서게 하였고, 1373년(공민왕 22) 최영(崔瑩)을 6도 도순문사로 삼아 군호(軍戶)[군 복무자 1명과 이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양호 2명으로 된 군대 편성의 단위]를 작성한 결과 군사의 수는 약 9만 4500명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경상도 2만 2000명, 양광도[현 충청도] 2만 명, 전라도 8,000명 등으로, 3도에 총병력의 60% 정도를 배치하였다. 이를 통해 부산 지역에도 대규모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 지역의 성곽]

왜구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성을 새로 쌓거나 기존의 성을 고치고 시설을 보강하였다. 『고려사』에 “1391년(공양왕 3) 기장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역시 왜구 침입에 대비한 시설이었을 것이다. 동래읍성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래현 성곽조 이첨(李詹)의 읍성기는 “원수 박위(朴葳)는 일찍이 김해 부사로 있을 때 망산성(望山城)을 쌓았다. 성을 지킬 준비를 한 다음 첩문을 발송하여 장정을 소집하고, 1387년(우왕 13) 8월 19일 공사를 시작하여 달을 넘겨 완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국에 성 수축령이 내려진 가운데 박위의 지휘로 동래읍성을 크게 고쳐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기장읍성과 동래읍성을 새로 쌓거나 보강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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