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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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葳 |
영어음역 | Bak Wi |
이칭/별칭 | 충의백(忠義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정은정 |
[정의]
고려 후기 부산 동래읍성을 쌓은 무신.
[활동 사항]
박위(朴葳)는 고려 말 우왕(禑王) 때 우달치(迂達赤)[고려 후기에 창설된 몽골식 군관]가 되었다. 1375년(우왕 2) 겨울 왜구의 노략질로 폐허가 된 김해의 부사가 되어 난민을 구호하고 부서진 집들을 고치는 등 복구 작업에 힘썼다. 당시 왜구들은 쓰시마[對馬]와 이키시마[壹岐島]에 근거지를 두고 수시로 고려 연안에 칩입, 노략질을 일삼았다. 고려에서는 여러 차례 일본 막부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단속을 요구하였으나 막부의 명령이 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박위는 왜구 방어책으로 여러 성을 축조하였다.
박위는 김해 부사를 지낼 때 김해 분산성(盆山城)을 쌓았고, 1384년(우왕 10)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일 때는 이문화(李文和)로 하여금 울산 신학성(神鶴城)을 쌓게 하였다. 동래읍성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원수 박위(朴葳)가 1387년(우왕 13) 8월 19일 공사를 시작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위는 이성계(李成桂)와 뜻을 같이하여 1388년 경상도 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요동 정벌(遼東征伐)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崔瑩)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1389년(창왕 1)에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쓰시마 정벌에 나서 적선 300여 척을 불태우는 등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이후 왜구의 노략질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박위는 후에 이성계 일파와 함께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였다. 조선 초기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자내고 양광도 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때 밀성(密城)[지금의 밀양]의 맹인 점쟁이 이흥무(李興茂)에게 고려 왕실의 복구 여부와 이성계의 운명을 점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대역 죄인으로 다루려 하였으나 태조(太祖)의 호의로 석방되었다. 이후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으나 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심효생(沈孝生) 등과 함께 정안 대군(定安大君)[후에 태종]에게 피살당했다.
[상훈과 추모]
1822년(순조 22) 박성기 등 밀양의 사림(士林)이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정곡리에 신남서원을 세우고 박기(朴耆)와 함께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