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5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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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玄仁 |
영어음역 | Hyeon In |
이칭/별칭 | 현동주(玄東柱),고토징[後藤仁]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포동 1가 7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창욱 |
[정의]
부산 출신으로 195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
[개설]
본명은 현동주(玄東柱). 아버지는 현명근이고, 어머니는 오봉식이다.
[활동 사항]
현인(玄仁)[1919~2002]은 1919년 12월 14일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 1가에서 태어났다. 영도에 있는 스탠더드석유회사를 다녔던 아버지 현명근과 일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었던 어머니 오봉식 사이의 2남 1녀 중 맏이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 회사의 사원 주택이 있던 영도와 할머니 댁이 있던 동래군 구포면을 오가며 성장하였다. 이후 석유 회사를 다니던 아버지가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도쿄[東京] 지사 기자가 되어 일본으로 떠나자, 5살 때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러시아의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랴핀(Fyodor Ivanovich Chaliapin)의 독창회를 보고 처음으로 음악에 깊이 매료되었다.
동래의 구포소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때 초량에 있던 영주소학교로 옮겼다. 5학년 때 아버지가 경성지국으로 전근 가면서 서울 서대문 죽첨소학교로 전학하였고, 1931년에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영어와 일어 그리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현인은 학교의 배구 대표 선수였을 만큼 운동도 잘 하였고, 방과 후에는 밴드부에서 일본의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었다. 3학년 때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던 현인은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193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험을 치르려 도쿄로 갔지만, 방향을 바꿔 우에노 공원 내의 동경음악학교[현 동경예술대학] 성악과에 입학하여 음악 공부를 시작하였다. 일본 유일의 관립(官立) 학교인 동경음악학교는 조선의 음악 엘리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음악 학교 진학을 괘씸하게 여긴 아버지 때문에 현인은 막노동으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1년 뒤 NHK 합창단의 모집 광고를 본 현인은 오디션에 응시하여 단원이 되었다. 유학 시절 일본 왕족 출신의 마리코와 교제하기도 하였지만, 본과 3학년 때 귀국하여 소학교 교사였던 조창길과 첫 결혼을 하였다.
1939년 고토징[後藤仁]으로 창씨 개명하였는데, 훗날 그의 예명이 된 현인(玄仁)은 고토라는 성씨만 현씨로 바꾼 것이다. 1942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성보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일하였다. 1943년 박단마(朴丹馬)·황해(黃海)·진방일 등과 악극단을 구성해 중국 텐진[天津]으로 가서 클럽 신태양의 무대에 올랐으며, 베이징[北京]·항저우[杭州]·상하이[上海] 등지로 일본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다녔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한 뒤에 베이징 비밀 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고, 서울로 돌아와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현인은 벌이가 좋은 미군 위문 공연에 뛰어들어 탱고를 전문으로 하는 고향경음악단을 조직하였다.
1947년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뉴스맨스 클럽을 무대로 「서울 야곡」을 불러 밤무대에서 이름을 알렸다. 이때 작곡가 박시춘(朴是春)의 제의로, 유호(兪湖)가 작사한 「신라의 달밤」[1946]을 음반으로 출반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다. 이런 인기 덕에 현인은 1949년 해방 후 최초의 음악 영화인 「푸른 언덕」에 주인공으로 선정되고,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무렵 현인은 세계를 풍미하던 「베사메 무쵸」나 「꿈속의 사랑」과 같은 곡을 번안해 노래하여,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952년에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Yves Montand)의 히트곡 「장미 빛 인생」 등을 불러 한국에 샹송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현인은 이후 「고향 만리」, 「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잇달아 히트시켜 1950년대에 가장 빛나는 대중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현인의 노래는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하고, 우울한 시대에 서민의 아픔을 달래 주었다.
1950년대 초 현인은 부산에서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였다. 1950년 4월 1일 동아 극장에서 은방울악극단의 ‘은방울쇼’에 당대 스타였던 가수 남인수(南仁樹)·박단마, 영화배우 황정자(黃貞子)·김승호(金勝鎬)·최은희(崔銀姬) 등과 함께 연예 활동을 하였다. 6·25 전쟁이 터지자 군부대 위문 공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한편, 1951년 3월 30일 부민관에서 ‘손목인과 그 악단’의 공연에 특별 출연하였으며, 1951년 4월 24일 동아 극장에서 ‘현인과 그 악단’을 만들어 「멍기의 노래」를 무대에 올렸다.
1952년 6월 1일 신청년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나운영 작곡]에 남인수·김정구(金貞九)·전옥(全玉)·박단마·신카나리아·장세정·이난영(李蘭影) 등과 출연하기도 하였다. 1953년 서울로 돌아간 현인은 박시춘(朴是春)의 은방울쇼단에 합류하면서 다시 큰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1950년대 말에 이르면서 현인의 음악 활동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결혼한 명창 박녹주(朴綠珠)의 조카딸인 박정혜와 1957년 파경을 맞았고, 1959년에는 봉봉쇼단을 만든 지 6개월 만에 파산하고 말았다.
결국 1974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세 번째 결혼을 하고, 사업을 벌였으나 부진을 면치 못하고 1981년 다시 귀국하였다. 하지만 대중의 음악 감수성은 이미 변해 있었기에, 지난 시절의 빛나던 영화를 다시 누리지는 못하였다. 2002년 4월 13일 현인은 당뇨 합병증을 얻어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으로는 부인 김미정과 장녀 현혜선(惠善), 차녀 현희봉(玄喜鳳), 삼녀 현지원(玄智媛), 장남 현재헌(玄在憲) 등 1남 3녀가 있다.
[저술 및 작품]
현인은 「베사메 무쵸」 등 탱고풍의 노래와 「장미빛 인생」, 「고엽」 등의 샹송을 번안해 노래하였다. 그리고 생전에 「고향 만리」,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굳세어라 금순아」, 「전우여 잘 자라」 등 한국 대중가요 160여 곡을 노래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에 있는 삼성 공원묘원에 마련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7년에 문화공보부 공로상 수상, 1990년 KBS 특별 가요 대상, 1996년 대한민국영상 음반 대상 본상, 1999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 예술 대상[화관 문화 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1991년 대구 망우 공원 내에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2000년 경주 불국사 앞에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각각 세워졌고, 사후인 2003년 부산광역시와 영도구청이 영도 다리 입구에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와 동상을 세웠다. 2005년 8월 부산광역시와 서구청은 송도 해수욕장에 현인 광장을 조성하고,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와 현인 동상[입상]을 세우고, 매년 현인 가요제를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