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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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皇室祝願莊嚴繡 |
영어의미역 | Embroidery for Praying for the Prosperity of the Royal Family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개항기의 궁중 자수 공예품.
[개설]
황실축엄장엄수(皇室祝願莊嚴繡)는 1902년(고종 39) 10월 범어사(梵魚寺)에 소속된 암자인 범어사 계명암(梵魚寺鷄鳴庵)에서 나라의 편안함과 황실의 번성을 위한 나라 제사[國祭]를 치를 때, 대한제국 황실에서 범어사에 하사한 한 쌍의 궁중 자수이다. 1999년 9월 3일 부산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자수에는 조선 왕조 제24대 임금 헌종(憲宗)의 아버지인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와 어머니 신정 황후(神貞皇后)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 금색 실로 각각 수놓아 있다.
문조 익황제는 제23대 임금 순조의 아들로서 자(字)는 덕인(德寅), 휘(諱)는 영(旲)이다. 세도 정치의 시기에 태어나 어려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11세 때 풍양 조씨(豊壤趙氏) 조만영(趙萬永)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9세 때인 1827년(순조 27)부터는 아버지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의 인물과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축출당한 소론 계열의 인물들을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대리청정 4년 만인 22세가 되던 해[1830년]에 요절하였다.
세자 시절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흔히 효명 세자(孝明世子)로도 불리며, 아들인 헌종이 아버지 순조의 뒤를 이어 제24대 임금으로 즉위한 후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899년(고종 36)에는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 익황제로 추존되었다. 헌종의 뒤를 이은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문조 익황제와 6촌 간인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아들 명복이 양자로 입적되어 제26대 임금[고종]으로 즉위하였다. 즉 고종이 문조 익황제의 양자였기 때문에 재추존을 하였던 것이다.
신정 황후는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로 아들 헌종이 임금으로 즉위한 후 남편이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 후에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조 대비라고 일컬어지는 신정 황후는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흥선 대원군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남편의 뒤를 잇게 하였다. 고종 즉위 초에는 수렴청정을 통하여 흥선 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하였으며, 1890년(고종 27)에 사망하였다. 이후 1899년에 남편과 함께 문조 익황제와 신정 황후로 각각 추존되었다.
[형태]
기본적인 형태는 세로 방향의 긴 직사각형으로, 상단은 지붕 모양을 하고 있다. 붉은색 공단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는 남색 공단을, 아래에는 옥색 공단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여기에 금실과 명주실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기법[평수, 이음수, 자련수, 가름수, 금박수 기법 등]으로 수를 놓았다.
문양을 살펴보면, 바탕인 중앙의 붉은색 공단 가장자리에 금실을 사용하여 두 겹의 직사각형 테두리를 두르고, 테두리 사이에는 당초문 장식을 수로 놓았다. 테두리의 안쪽 중앙부에는 문조 익황제와 신정 황후의 명복을 비는 내용의 서원문 ‘봉청 문조 익황제 선가(奉請文祖翼皇帝仙駕)’와 ‘봉청 신정 익황후 선가(奉請神貞翼皇后仙駕)’가 각각 금실로 수놓아 있다. 테두리의 윗부분에는 붉은 바탕에 녹색실로 연꽃잎 문양을 수놓았고, 아랫부분에는 녹색 바탕에 갖가지 색실로 연꽃 문양을 수놓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윗부분 양쪽에는 향(香), 오곡(五穀), 경(經) 등을 넣었던 다라니 주머니 한 쌍이 달려 있고, 주머니 바깥쪽으로는 역시 한 쌍의 매듭이 장식으로 달려 있다. 매듭의 아랫부분에는 양 모서리에 수술을 달아서 장식하였다. 주머니는 다소 낡은 상태이며 매듭의 일부는 뒤에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특징]
한 쌍의 황실축엄장엄수는 서원문을 제외하고는 둘의 재질과 기법, 그리고 문양이 동일하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문조 익황제와 신정 황후 두 사람이 추존된 1899년 이후부터 범어사 계명암에서 나라 제사를 지낸 1902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황실축엄장엄수는 대한제국 당시의 궁중 자수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