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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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蓮山洞古墳群 |
영어의미역 | Ancient Tombs of Yeonseon-d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90-4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는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의 고분군.
[위치]
부산 연산동 고분군은 황령산의 북쪽 지맥에 속하는 배산[254m]의 북쪽으로 뻗어 내린 50m의 능선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부산 연산동 고분군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1988년에 경성대학교 박물관이 8호분을, 신라대학교 박물관이 4호분을 각각 조사하였다. 또한 도로 개설용 터널 공사로 인해 2000년에 경사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고분군 구릉의 북쪽 일대에 주택 재개발 공사가 계획되면서 2007년 이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10호분의 서남쪽 사면 일대가 채육공원 부지로 개발되면서 2010년에 조사가 실시되었고, 고총 고분군의 정비 복원을 위한 기초 자료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 결과, 부산 연산동 고분군은 5세기 후반부터 8세기까지 무덤이 조영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구덩식 돌방무덤·덧널무덤·독무덤·앞트기식 돌방무덤·움무덤·화장묘 등 다양한 무덤 구조가 확인되었고, 주된 무덤 구조는 구덩식 돌방무덤이었다. 무덤 조영이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는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이었는데, 이 시기에 조영된 무덤 수는 수백여 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구릉 능선을 따라 조영된 고총 고분은 지금까지 10기로 알려져 왔으나, 2010년 조사에서 모두 16기가 확인되었다. 한편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뿐만 아니라 고려 및 조선 시대의 분묘도 조사되었다. 조선 시대 분묘인 35호분·43호분·73호분에서 철제 가위가 각 1점씩 출토되었다. 35호분의 경우 피장자의 하반신 쪽에서 청동 반지 2점, 구슬 39점, 청동 거울 1점이 부장되어 있었다.
[형태]
1. 대형분
대형분은 1기씩 독립된 경우도 있지만, 2기 또는 3기의 봉분이 연접된 경우도 확인되었다. 구릉 능선부를 따라 분구 직경이 15~25m 내외의 대형분이 배치되었다. 대형분은 해발이 높은 남쪽 능선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으로 가면서 만들어졌다. 능선 정상부의 너비가 넓었다가 좁아지는 부분이 2곳을 경계로 3개의 그룹이 형성되었는데, 무덤에 매장된 사람 사이에 친연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형분의 매장 주체 시설은 돌로 곽을 만들고 돌 뚜껑을 얹은 구덩식 돌방무덤이다.
대형분의 대부분은 도굴이 심하게 되어 석곽이 많이 파괴되었고, 부장품이 밖으로 나와 있다. 구릉 위쪽에 있는 8호분은 분구의 규모가 직경 17~22m이고, 분구의 형태는 장타원형에 가깝다. 이 분구의 중앙 부분에 등고선과 같은 방향으로 길이 12.4m, 너비 5.3m의 장방형 묘광을 파고, 이 묘광 내에 다시 50㎝가량의 둑을 두고 주·부곽의 묘광을 일직선으로 판 뒤 하나의 긴 돌방을 축조하여 주곽과 부곽을 마련하였다. 구릉 아래쪽에 있는 4호분은 분구의 규모가 직경 12.7~4m, 높이 2.16m이고, 형태는 타원형이다. 묘광은 풍화암반층을 길이 10.5m, 너비 3.7~4.1m, 깊이 2.4m 정도의 장방형으로 파고, 그 안에 석곽을 축조하였다. 석곽은 묘광의 벽에 기대어 할석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석곽의 중앙부에 할석으로 격벽을 만들어 주곽과 부곽을 구분하였다. 8호분과는 달리 주·부곽의 구분 없이 하나의 긴 석곽을 만든 뒤 가운데 격벽을 별도로 쌓은 것이다. 석곽의 내부는 완전히 도굴되어 원래의 위치에 있는 유물은 없고 모두 파편뿐이다.
2. 중·소형분
서쪽과 동쪽의 사면에는 석곽 길이가 3~5m 내외의 중·소형분이 배치되었다. 중··소형분은 경사가 심한 동쪽보다는 경사가 완만한 서쪽 사면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덧널무덤은 서쪽 구릉 사면에 구덩식 돌방무덤과 같이 조영되었고, 시기도 같다. 묘광 내에 목곽을 설치하고, 목곽 내에 주검과 유물을 부장하였다. 4세기의 덧널무덤보다 규모도 작고, 깊이도 얕다. 중·소형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덩식 돌방무덤은 구릉 능선 정상부는 물론 경사면에 분포한다. 구덩식 돌방무덤은 묘광의 길이가 160~400㎝, 폭이 80~170㎝ 정도의 크기로 장방형의 묘광을 파고 내부에 석곽을 축조하였다.
3. 벽석의 축조 기법
벽석의 축조 기법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유형은 장·단벽을 세로로 1단만 세워쌓기하여 개석을 얹은 형태이다. 석곽의 면적이 1.0㎡ 이하의 초소형 무덤에서 확인되며, 개석은 장방형의 판석을 가로로 얹었다. 2유형은 양 장벽의 최하단석을 30~50㎝ 정도의 할석을 사용하여 가로로 세워쌓기한 뒤 2단 벽석부터는 20~40㎝ 정도의 천석과 할석을 눕혀쌓기 또는 세워쌓기를 하였다. 양 단벽은 넓적한 돌을 1열 혹은 2열로 세워쌓기한 뒤 그 위로 장벽과 같은 크기의 할석을 눕혀쌓기를 하였다. 석곽 규모에서 봤을 때 초소형부터 중형에 이르는 다양한 규모에서 이러한 구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형태로 사용되었다.
3유형은 10~30㎝ 내외의 비교적 작은 천석과 할석을 사용하여 최하단석에서부터 엉성하게 쌓은 형태이다. 대부분 북쪽 사면 말단부에서 이러한 형태가 나타난다. 바닥 면은 시상석을 마련한 20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생토면을 사용하였다. 시상석은 10㎝ 내외의 천석과 할석을 사용하여 전면에 깐 것과 드문드문 깐 것으로 나뉘는데, 대부분이 중앙부 혹은 한쪽으로 치우쳐 바닥의 일부에만 시상석을 마련하였다. 특히 82호분은 조사 구역 내에서 가장 큰 구덩식 돌방무덤인데 예외적으로 7㎝ 내외의 작은 역석(礫石)을 전면에 깔았다.
[출토 유물]
토기류가 대부분으로, 기종 또한 뚜겅 있는 굽다리 접시[유개 고배(有蓋高杯)], 굽다리 목 긴 항아리[대부 장경호(臺附長頸壺)],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短頸壺)], 컵형 토기, 연질옹(軟質甕) 등이 모든 유구에서 출토되었다. 철기류는 쇠투겁창, 쇠손칼, 쇠화살촉 등 무기류가 주를 이루며, 주조 및 단조로 만든 쇠낫·쇠도끼 등의 농공구류도 간혹 확인된다. 특히 출토 유물 중에서 외래계 토기가 확인되는 점이 주목된다. 96호분의 부장품에서는 창녕계 토기인 굽 접시[대부완(兩耳臺附碗)] 1점이 확인되었으며, 58호분에서는 고령계 토기의 특징을 가진 연질개(軟質蓋) 2점이 출토되었다.
4호분과 8호분에서 출토된 토기는 굽다리 접시·기대(器臺)·굽다리 목 긴 항아리·원저 단경호(圓底短頸壺)·개(蓋) 등으로, 모두 신라 토기이다. 철기류는 4호분에서 성시구편(盛矢具片)·금동 금구편(金銅金具片)·쇠손칼·쇠화살촉·유자 이기편(有刺利器片) 등이 출토되었다. 8호분에서는 주곽에서 비늘 갑옷·큰 칼 조각·쇠화살촉·쇠도끼 등의 무구류와 금동장 행엽·발걸이 등의 마구류 및 유리제의 경옥 등이 주피장자의 목 부분인 남쪽에서 출토되었고, 부곽에서는 다수의 판갑편이 출토되었다.
독무덤은 구덩식 돌방무덤 또는 덧널무덤에 붙여서 만들었는데, 2개의 연질옹 아가리를 맞대어서 만든 합구식(合口式)이고, 규모가 소형이어서 유아 또는 소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삼국 시대의 고분군에서는 처음으로 고분 제사와 관련한 3기의 취사 시설이 확인되었다. 유구 바닥 면에서는 소토와 소결 흔적이 뚜렷하게 확인되었으며, 연질 토기편이 다수 확인되었다. 특히 1호분과 3호분에서는 각각 봉상 철기와 쇠도끼가 확인되었다. 1호분의 경우 유구의 양단에 15㎝ 내외의 할석 2매는 바닥 면을 굴착하여 세웠다.
[현황]
부산 연산동 고분군의 서쪽 사면은 도로 개설용 터널 공사, 북쪽 사면은 주택 재개발 공사가 진행되고, 서남쪽 사면 일대가 체육공원 부지로 개발되어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그러나 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면서 부산 연산동 고분군의 보존을 위해 보호구역 내 토지 매입과 고총 고분군의 정비 복원을 추진하였다. 부산 연산동 고분군의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를 고려하여 2017년 6월 30일 사적 제539호로 승격 지정하였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 연산동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 때 철제 갑주(甲胄)들이 출토되어 고대의 한국과 일본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서 일찍부터 국내외 학계에서 관심을 받아 왔다. 또한 삼국 시대 부산 지역의 유일한 원형 성토 분구가 있는 고분군으로서 부산 복천동 고분군과 더불어 삼국 시대 부산의 역사와 문화 구명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부산 연산동 고분군은 삼국 시대 부산 지역을 통치하던 최고 지배층의 고분군이자 묘역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발견된 갑주류와 8호분에서 출토된 비늘 갑옷, 쇠로 만든 갑옷[판갑(板甲)]등의 갑주류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의 수장층은 무장의 성격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출토된 토기들은 동 시기의 신라 토기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신라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음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고총 고분이 조영된 점으로 보아 지방의 기존 지배 계층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