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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381
한자 金素雲
영어음역 Gim Soun
이칭/별칭 김교중(金敎重),소운(巢雲),삼오당(三誤堂)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윤인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수필가|번역가
성별
대표관직|경력 『청려』 발행인
출생 시기/일시 1908년 1월 5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3년 - 가이세이중등학교 야간 학부 중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절영도 소년단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제국통신사 경성지사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시대 일보』에 시 「신조」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25년 6월 - 조선일보사 부산 통신원이 됨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일본의 『지상 낙원』에 「조선의 농민 가요」 기고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매일 신보』 기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조선 민요집』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조선 동요선』, 『조선 민요선』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유색의 운』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조선 시집』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주간지 『청려』 발행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동래고등학교 교가 노랫말 지음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마이동풍첩』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동화집 『보리알 한 톨』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일본어 수필집 『은수 삼십 년』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삼오당 잡필』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64년 - 『희망은 아직 버릴 수 없다』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68년 - 『물 한 그릇의 행복』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76년 - 『한국 현대 문학 선집』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77년 - 한국 번역 문학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8년 - 『김소운 수필 전집』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80년 - 대한민국 은관 문화 훈장 수상
몰년 시기/일시 1981년 11월 2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8년 2월 21일 - 김소운 문학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92년 - 김소운 문학상 제정[도쿄대학교 비교문학회]
추모 시기/일시 2008년 - 소운 문학상 제정
출생지 영도 - 부산광역시 영도구
거주|이주지 동래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학|강학지 옥성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학|강학지 가이세이중등학교 - 일본 도쿄도
활동지 조선일보사 - 부산광역시
활동지 매일신보사 - 부산광역시
활동지 백랑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묘소|단소 모란 공원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606-1
관련 유적 동삼동 쌈지 공원 -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산 134-1 동삼동 쌈지 공원지도보기

[정의]

부산 출신의 시인이자 수필가, 번역가.

[가계]

본명은 김교중(金敎重), 호는 소운(巢雲), 필명은 삼오당(三誤堂). 광복 이후 이름을 김소운(金素雲)으로 바꾸었다. 할아버지는 한국인 최초로 부산에 교회[제일영도교회]를 세운 김치몽(金致夢)이고, 아버지는 1909년 10월 20일 의병에게 살해당한 진주재무서 주사 김옥현(金玉顯)이며, 어머니는 박덕수(朴德水)이다. 부인은 구속자가족협의회[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전신]의 창설을 주도한 김한림이고, 딸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한 농민 운동가 김윤이다.

[활동 사항]

김소운[1908~1981]은 1908년 1월 5일 부산광역시 영도구에서 출생하였다. 옥성보통학교[현 영도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영도 3·1 운동의 주축인 ‘절영도 소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다. 이 일로 김소운은 퇴학을 당하고, 절영도 소년단도 이듬해 강제 해산되었다. 1920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1921년 4월 도쿄 가이세이중등학교[開成中等學校] 야간 학부에 입학하였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 후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1924년 제국통신사 경성지사에서 근무하다가 이듬해 6월 부산으로 내려가 『조선 일보』 통신원이 되었으며 1929년 『매일 신보』의 학예부 기자가 되었다. 이 시기 아동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다가 1931년 다시 일본으로 갔다.

김소운은 광복 이후 부산 광복동에서 그릴 ‘백랑(白廊)’을 운영하였고, 동래에 혼자 살면서 서울 문단을 오갔다. 1948년 주간지 『청려(靑驢)』를 발행하였다가 곧 발매 금지 당했다. 1952년에는 동래고등학교 교가의 노랫말을 썼는데, 비판적인 내용 때문에 반정부 분자로 낙인되었다. 1952년 베네치아 국제 예술가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 후 일본에서 체류하다가 1965년 영구 귀국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소운은 평생 동안 한국의 민요와 동요,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김소운의 작품들은 유려한 문체와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한국 수필 문학의 정수를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소운의 창작 활동은 1923년 『시대 일보』에 시 「신조(信條)」를 발표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25년 첫 시집 『출범』을 내려다 돈이 부족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번역 문학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여 1927년 『조선의 농민 가요』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 잡지 『지상 낙원』에 기고하였다. 이후 민요, 동요, 동화, 현대 시, 사화(史話) 등 여러 분야의 작품들을 번역하였다.

대표적인 번역집은 『조선 민요집』[1929], 『조선 동요선』[1933], 『조선 민요선』[1933], 『유색(乳色)의 운(雲)』[1941], 『조선 시집』[1943] 등이다. 1976년에는 약 3년간의 작업 끝에 『한국 현대 문학 선집』[5권]을 발간하였다. 김소운은 한국을 대표하는 수필가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 『마이동풍첩(馬耳東風帖)』[1952], 『삼오당 잡필(三誤堂雜筆)』[1955], 『희망은 아직 버릴 수 없다』[1964], 『물 한 그릇의 행복』[1968] 등이 있고, 1978년 『김소운 수필 전집』[5권]을 냈다. 『은수 삼십 년(恩讐三十年)』[1954] 등의 일본어 수필집과 동화집 『보리알 한 톨』[1952]이 있다.

[묘소]

김소운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606-1번지 모란 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한국 번역 문학상, 1980년 대한민국 금관 문화 훈장을 수상하였다. 1998년 2월 21일 우리문학기림회에서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산 134-1번지 쌈지 공원에 김소운 문학비를 건립하였고, 2008년 소운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1992년 일본 도쿄대학교 비교문학회에서 김소운 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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