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76 |
---|---|
한자 | 鄭孔采 |
영어음역 | Jeong Gongchae |
이칭/별칭 | 성촌(星村)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순욱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
[활동 사항]
정공채(鄭孔采)[1934~2008]의 호는 성촌(星村)이다. 1934년 12월 22일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1945년 부산진초등학교 5학년 때 진주로 이사하여 진주농림중학교와 진주농림고등학교[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하였다. 고교 시절 학원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여서는 제1회 연세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일찍이 청년 문사로서 문재(文才)를 떨쳤다.
1958년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 일보』 기자로 입사하였다. 같은 해 『현대 문학』 4월호에 시인 박두진(朴斗鎭)의 추천을 받아 시 「하늘과 아들」로 등단하였다. 1950년대 말 정공채는 ‘천의무봉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만큼 전후파(戰後派) 특유의 도시적 감성으로 실존적 고독과 고뇌를 노래하였다. 1960년 학원사 기자, 문화방송국 제1기 프로듀서를 거쳐 하동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시기에 정공채는 『국제 신보』 편집국장이었던 이병주(李炳注)와 동향이라는 연고로 1960년 4월 14일자 『국제 신보』 1면에 혁명 시 「하늘이여」를 게재하여 혁명의 열기를 북돋웠다.
1961년 진보 언론 매체인 『민족 일보』의 기자로 옮겼고, 1963년 『현실』, 『시단(詩壇)』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현대 문학』 12월호에 발표한 장시 「미팔군의 차」는 반미주의를 표방했다는 이유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발표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일본 신문 잡지들이 번역, 소개한 후에 뒤늦게 논란에 휩싸여 정공채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싸우고자 한 정공채의 시 정신과 사회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중앙 문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1978~1987년 현대시인협회 부회장, 1982~1986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1998년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2008년 4월 30일 75세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시집으로 『정공채 시집 있습니까』[유림사, 1979], 『해점(海店)』[관동출판사, 1981], 『아리랑』[오상사, 1986], 『사람 소리』[평야, 1989], 『미8군의 차』[인문당, 1990], 『땅에 글을 쓰다』[신원문화사, 1990], 『새로운 우수(憂愁)』[제3의문학, 2000] 등이 있다. 사후에 『정공채 시 전집』[제3의문학, 2008]이 나왔다. 수필집 『지금 청춘(靑春)』[신여원, 1979]과 『비에 젖읍시다』[야실사, 1980], 역사 소설 『대초한지(大楚漢志)』[대가출판사, 1980], 평전 『아! 전혜린』[문학예술사, 1982], 『우리 노천명』[대가출판사, 1983] 등의 저작을 남겼다.
[묘소]
정공채의 묘는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술상리 공원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59년 제5회 현대 문학상, 1979년 제4회 시 문학상, 1981년 제1회 한국문학협회상, 1998년 제8회 편운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 제41회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학상, 2005년 제7회 설송 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2001년 12월 27일 국립 3·15 민주 묘지에 3·15 의거 기념 시비, 2008년 4월 19일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섬호정 문학 공원에 「찬불이하동가(燦不二河東歌)」 시비가 세워졌다. 2009년 제1회 정공채 문학상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