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1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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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吉志 |
영어음역 | Gelson Engel |
이칭/별칭 | 왕길지(王吉志)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763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상규 1 |
[정의]
부산 일신여학교 교장을 역임한 호주 장로교 목사이자 선교사.
[활동 사항]
겔손 엥겔(Gelson Engel)[1868~1954]은 1868년 독일 위템베르크에서 태어났다. 한국식 이름은 왕길지(王吉志)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의 파송을 받고, 1900년 10월 29일 32세의 나이로 내한하였다. 겔손 엥겔은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특출한 인물이었다.
언어에 대한 조예가 깊어 헬라 어[고전 헬라 어와 신약 성경 헬라 어인 코이네 헬라 어], 히브리 어, 라틴 어 등 고전어, 영어, 불어, 이태리어 등 서방 현대어와 마라티 어[Marathi], 힌디 어[Hindi], 우르드 어[Urdu] 등 인도의 방언 등 10여 개국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었다. 독일어는 모국어이므로 말할 것도 없고 한국어와 중국어 그리고 후일 일본어도 독학하여 불편 없이 사용할 정도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피아노는 물론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이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 기간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습득한 겔손 엥겔은 경상남도 동부 지역, 즉 울산·기장·서창·언양·병영 등지를 순회하였다. 그 결과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겔손 엥겔과 직접적인 관계에 의해 설립된 교회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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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이후 1913년까지 일신여학교[현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제2대 교장으로 일하였고, 1913년 9월 7일 경성의 소안동예배당에서 회집한 제2회 조선 야소교 장로교 총회에서 언더우드(Underwood)에 이어 제2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봉사하였다. 이 보다 앞서 1911년에 조직된 제1회 경상노회에서는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1912년까지 봉사하기도 하였다.
1916년 경상노회가 경남노회와 경북노회로 분리될 때 경남노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1916년부터 1917년까지 노회장으로 노회의 조직과 사업, 행정적 기초를 닦았다. 특히 1920년부터 성경 개역 위원으로 참여하여 성경 개역 작업에 기여하였고, 정치 조례 편집 위원으로 선정되어 신경, 규칙[정치], 각항 예식서, 권징 조례의 제정 등의 교회 정치 관계 문서 작성에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찬송가 편찬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부산진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북장로교 선교부와 선교지 분담 건을 처리하였고, 호주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평양신학교 교수단의 일원으로 신학 교육에 참여하여 성경 언어와 교회사 교수로 활동하였고, 도서관장으로 봉사하였다. 1938년 한국에서 은퇴하기까지 38년 간 한국에서 봉사하였다. 처음에는 부산과 경상남도 지방에서 개척 전도자로 활동하였고, 호주선교부가 설립한 일신여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나, 1919년에는 평양으로 옮겨가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그곳의 장로교신학교 교수로 봉사하였다. 겔손 엥겔은 한국에서 교회 설립자로 교회 지도자로, 특히 성경 번역가로 활동하였다. 1954년 8월 16일 호주 멜버른(Melbourne)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상과 저술]
겔손 엥겔은 경건주의[Pietism]적 환경에서 성장하여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미국 출신 선교사들보다 더 철저한 청교도적 성향을 띠었다. 평양의 장로교 신학 교육 기관에서 교수하면서 필요한 교과서를 저술하였는데, 『고교회 변증론(古敎會辨證論)』[A History of Apologetics of the Ancient Christian Church]과 『경정 후 사기(更正後史記)』[Church History, Post Reformation Period]가 대표적이었다.
또 1918년 창간된 『신학지남』의 초대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편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대표적으로 「성 어거스틴」(『신학지남』1, 1918. 3), 「구약상으로 본 하나님의 신」(『신학지남』39, 1926. 5), 「성신을 파송하심」(『신학지남』44, 1929. 3) 등 총 27회에 걸쳐 논문을 게재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발행하였던 『Korea Mission Field』에도 7편의 글을 기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