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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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考古會 |
영어공식명칭 | Pusan Archeological Societ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순자 |
[정의]
1930년대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에서 설립된 고고학 연구 단체.
[개설]
부산 재주자를 중심으로 부산 등 지역의 고고학 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1931년 9월 12일에 설립된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의 모임인 부산고고회는 1936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1941년 9월까지 그 명맥을 이어갔다. 주로 강연회·학술 발표회, 연구 여행·발굴 조사, 전람회 등의 학술 활동을 하였으며, 부산박물관 건립 운동도 전개하였다.
[설립 목적]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고고학에 관련된 연구를 축적하고 그 취지를 보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식민 통치의 역사적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한반도의 고적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으며, 이와 함께 각 지역에서도 1910년대부터 지역의 문화 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보존회 및 보승회 등의 민간단체들이 설립되었는데, 부산고고회 역시 이들 단체들과 비슷한 성격은 가졌다.
[변천]
부산고고회는 처음에는 부산에서 고수하호부(高須賀虎夫)·궁천조(宮川肇) 2명을 중심으로 한 소그룹과 급천민차랑(及川民次郞)·좌산우좌길(佐山右左吉)·빈전준상(濱田俊象) 및 대곡미태랑(大曲美太郞)이 중심이 된 다른 한 소그룹이 각자 종종 집회를 갖다가, 이 두 그룹이 하나의 학술 단체로 합쳐져 1931년 9월 12일 설립되었다. 부산고고회의 간사는 1928년에 조선총독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부산에서 연구 생활에 전념하고 있던 대곡미태랑,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인 급천민차랑, 부산 철도 호텔 이사인 궁천조 등이었다가 1936년에는 빈전준상, 길전신일(吉田新一), 죽하융평(竹下隆平) 등으로 바뀌었다.
부산고고회의 회원은 설립 당시 18명가량이었으나 점차 증가하여 1936년경에는 41명으로 늘었다. 특히 1936년에 회원이 된 사람들 가운데는 지속적인 강연회를 통해 학술적인 면에 관심을 가진 교원들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지역도 부산 이외의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설립 당시 부산고고회 사무소는 부산 철도 호텔 내에 두었다. 부산고고회 창립 회원들은 일찍이 조선에 건너와 부산에 오랫동안 머물러 살던 인물들로 패총, 기와, 토기, 청자 등 다양한 한국의 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선총독부가 진행하던 고적 조사 사업과는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터전을 미리 마련하고 있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부산고고회의 주요 활동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강연회 등 학술 발표회 개최이다. 좌담회(座談會), 다화회(茶話會) 등을 포함한 강연회의 주제 내용을 보면, 선사 시대 7회, 낙랑 3회, 삼국 시대 2회, 기와 및 도자 5회, 사원 5회, 왜성 4회, 그리고 박물관 2회 등의 다양한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일찍이 이 지역에서 패총 발굴 조사가 진행됨으로써 선사 시대 관련 주제가 많았다. 그리고 1933년 4월 7일에는 ‘임나 문화의 보존에 대해’, 8월 8일에는 흑판승미(黑板勝美)가 ‘향토 박물관 건설에 대해’ 등의 발표를 통해 부산이 임나 문화의 중요한 지역으로서 박물관 설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좌담회·다화회·월례회를 포함한 강연회는 1932년부터 1933년에 걸쳐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이후 1936년까지 지속되었다.
강연회의 강사는 조선 재주자들과 일본과 만주 재주 연구자들이 포함되었는데, 특히 조선 고적 조사 사업에 관여하였던 관야정(關野貞), 빈전경작(濱田耕作), 흑판승미가 참여하였다. 이들은 조선에서 조사와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부산고고회의 요청에 의해 강연을 하였다.
둘째, 연구 여행(硏學旅行) 및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1931년 11월 동래 지방, 양산 지방 연구 여행을 시작으로 1941년까지 이어졌다. 특히 연구 여행과 발굴에서는 패총, 왜성 조사 연구와 기와·토기의 수집 연구에 집중하였던 것이 주목된다. 패총 조사의 경우는 부산고고회 설립 이전에 부산 동래 패총과 부산 동삼동 패총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부산고고회의 설립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회원들의 관심이 지속되었다. 1932년에는 부산고고회 설립 1주년 기념사업으로 부산 동삼동 패총의 조사를 실시하였고, 1933년에는 영선동 조개더미, 1934년에는 다대포 조개더미를 대표적으로 조사하였다.
셋째는 전람회 등을 통해 연구 자료를 수집·공개하고 보존 방법을 강구하였다. 부산고고회는 창립을 계기로 1931년 10월 10일부터 15일까지 서점 길전박문당(吉田博文堂) 3층에서 고고 자료 전람회를 개최하여 당시 소장하고 있던 기와와 토기를 진열하였다. 1932년 6월 전람회에서는 조선의 도자를 전시하였는데, 이때는 궁천조 등을 비롯한 개인 수집가들이 자신의 수장품의 일부를 전시회에 제공하였다.
한편 부산고고회는 부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부산에 여행자를 많이 유치하기 위해 일본의 향토 박물관 건설 운동의 영향을 받아 박물관 설립의 필요성을 적극 강조하였다. 그러나 박물관 건립을 위해서는 재정의 확보가 급선무였기에 1930년대 부산은 물론 조선의 유력 자본가였던 카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郞]가 참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고적 조사에 관심을 가졌던 흑판승미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박물관 설립 문제를 구체화해갔다.
그러나 당시 경상남도 도지사와 내무부장이 경질되고, 카시이 겐타로의 개인적인 사정 및 박물관 건설 방향에 대한 의견 차이로 박물관 설립 운동은 중단되었다. 이후에도 부산박물관은 내선일체를 직접 보여주는 역사의 장으로 자리 잡을 것을 확신하면서 추진되었으나, 끝내 그 성과를 보지 못하였고 카시이 겐타로가 박물관을 세우려던 부산부 본정(本町) 향추 공원(香椎公園) 내에는 카시이 겐타로의 동상만이 세워졌다. 비록 박물관 설립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부산고고회는 1941년 9월까지는 그 활동이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부산고고회는 부산 재주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부산 등 인근 지역의 패총 및 왜성을 연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다수의 유물들이 수집·전시되었다. 참여한 사람들은 역사학이나 고고학 전문가들이기보다는 타 방면의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이들은 지역 고적보존회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부산 향토 문화를 탐구하였으며, 향토 박물관적 성격을 지닌 박물관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