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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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政 |
영어음역 | Heo Jeong |
이칭/별칭 | 우양(友洋),허성수(許聖壽),국로(國老)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4·19 혁명 후 과도 정부를 이끈 정치인.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우양(友洋), 초명은 허성수(許聖壽). 1896년 4월 8일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19통 10호에서 아버지 허문일(許文逸)과 어머니 김술이(金述伊)의 5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허정의 집안은 울산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다가 아버지 대에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 허문일은 무역 중개업인 물상객주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활동 사항]
허정(許政)은 동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6세 때부터 집 근처의 영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15세에 초량사립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보성중학교에 다니면서 황성 기독교 청년 회관 중학 과정에 나가 영어를 배웠고, 여기서 학감 이승만(李承晩)을 만났다. 이어 허정은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하고 1915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부산 초량으로 내려와 가사를 돌보다 3·1 운동을 목격 후 1919년 7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허정은 망명 후 상하이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이후 상하이 임시 정부 요인 김규식(金奎植)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지 못하고 1920년 7월 미국 뉴욕으로 갔다. 여기서 한인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북미재류한인교민단의 총단장으로 당선되었다. 서재필(徐載弼)이 주도하여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제1차 한인연합회의와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허정은 미국에 체류하며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사업을 지지하고 도왔다. 그는 한인 교포들에 대한 인두세 징수와 구미위원부 기관지의 발간 업무를 맡았다.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뜻을 가진 『삼일 신보』 사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발간하던 『태평양 잡지』의 발간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허정은 1932년 7월 14년 만에 37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이화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고 동래 일신여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하던 백귀란(白貴蘭)과 결혼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가 일제의 탄압을 받았을 때,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았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에는 홍원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이후 충청북도 영동에서 이기붕(李起鵬)과 공동 투자하여 광산을 경영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경상남도 도당 총무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 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948년 5·10 선거에서 고향 초량이 포함된 부산 을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10월 교통부장관에 임명되었고, 철도와 교통부 직원의 노조 활동을 금지시켰다. 1950년 3월 사회부장관이 되어 임시 수도 부산에서 전시 혼란기의 수많은 이재민과 고아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57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어 1959년 6월 11일까지 재임하였다. 1958년 한국 YMCA 재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59년에는 한일 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1960년 4월 이승만에 의해 외무부장관으로 기용되었다.
허정은 1960년 4·19 혁명 후 과도 정부의 대통령 권한 대행 겸 내각 수반이 되었다. 그는 ‘혁명적 목표를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행한다’는 슬로건을 표방하고 활동하였다. 허정 과도 정부는 시민들의 국회 해산 요구를 묵살하고 민주당의 개헌안에 따랐다. 과도 정부의 임무는 치안을 유지하고 4·19 혁명에서 고양된 민중의 혁명 열망을 충족시키면서 새로운 질서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임무는 이승만의 충실한 지지자로서 이승만 의도 하에 시국을 수습하는 책임자 자리에 오른 태생적 한계 때문에 완수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허정은 민중의 혁명적 열기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구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구시대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는 1969년에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고,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원을 지냈다. 1988년 9월 18일에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나의 회고록」[『한국 일보』, 1972년 10월 4일~1972년 11월 14일]과 자서전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 1979]이 있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44-7번지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국가 유공자 제1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88년 청조 근정 훈장을 수여받았다. 인촌 문화상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