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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478
한자 徐相昊
영어음역 Seo Sangho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희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변사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고등연예관 변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3년~1914년 - 우미관 변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4년 6월~1914년 7월 - 제이대정관 주임 변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4년 7월~1915년 - 우미관 주임 변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황금관 변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단성사 주임 변사로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38년 8월 2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학교|수학지 일본 도쿄
활동지 수문동 경찰서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활동지 고등연예관 - 서울특별시
활동지 혁신선미단 - 서울특별시
활동지 우미관 - 서울특별시
활동지 제이대정관 - 서울특별시
활동지 황금관 - 서울특별시
활동지 단성사 - 서울특별시
활동지 조선 극장 - 부산광역시 중구 창선동

[정의]

부산 출신으로 무성 영화 시대의 인기 변사.

[활동 사항]

서상호(徐相昊)[1890~1938]는 189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서상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였다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언제 어떤 경로로 서울로 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때 종로의 수문동경찰서에서 통역생으로 지냈다. 혁신선미단에서 연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지만, 서상호가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변사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23세 때인 1912년 고등연예관에서 변사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서상호는 1913년부터 유명한 우미관에서 변사로 활동하였다. 1914년 6월 황금정[구 구리개]의 제이대정관으로 옮겨 7월까지 주임 변사를 지냈으며, 다시 우미관으로 옮겨 1915년까지 주임 변사로 일하였다. 이듬해인 1916년에는 황금유원지 내에 있던 황금관의 변사를 지냈으며, 1919년에는 단성사의 주임 변사로 활동하였다.

발성 영화가 유행하기 이전인 초창기 영화관에서 남다른 언변과 재치로 관객을 휘어잡던 유명 변사들은 대중 문화계의 톱스타였다. 부산 출생인지라 악센트가 붙은 남도 사투리를 썼던 서상호는 쩌렁쩌렁한 성대로 유머와 위트를 섞은 해설을 구사하여 관객들의 인기를 얻었다.

서상호는 외국 무성 영화의 등장인물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꾸어 부르는 등 그 나름의 해설 방식으로 인기를 독차지했고, 우미관으로 옮겨서는 막간을 이용한 그만의 ‘뿡뿡이춤’을 선보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인기가 높아지자 단성사로 자리를 옮기고는 돈을 물 쓰듯이 하는 방탕한 생활을 해 나갔다. 또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 영화 상설관에도 자주 초청되어 갔는데, 서상호의 해설을 듣고 관객들이 일본인인지 아닌지 내기를 할 정도였다.

서상호는 동생 서상필과 함께 힘이 장사라고 알려져 차력 형제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서상호 해설의 특징은 영사되는 영화의 템포에 맞추어 자막을 번역하고 어려운 한문 문구를 인용하면서 마치 웅변을 하는 것 같은 유유함이었다. 하지만 발성 영화의 시대가 오자 변사의 역할도 사라져 단성사에서 쫓겨났고, 도색, 낭비와 더불어 마약에도 중독되었다. 이후 서상호는 부산의 조선 극장을 비롯하여 지방의 극장을 전전하다가 그마저도 마약 중독으로 제대로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되자 구걸을 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1938년 8월 2일 우미관의 화장실에서 피를 토하고 객사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무성 영화 해설 대표작으로 「명금」과 「암굴왕」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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