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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464
한자 金甲
영어음역 Gim Gap
이칭/별칭 김진원(金瑨源)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309번길 7[안락동 1038]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부장
출생 시기/일시 1889년 1월 7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6년 4월 - 개양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0년 3월 - 동명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대동청년단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17년 5월 20일 - 중국으로 건너감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동제사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대종교에 입교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0일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경상도 대표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2일 -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교통부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8일 -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위원회 이사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의열단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1년 4월 17일 - 군사 통일 회의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3년 1월 - 국민 대표 회의 참석
활동 시기/일시 1924년 4월 - 법무 총장 대리 차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2월 - 대한민국 임시 정부 노동 총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6년 2월 14일 - 국무 위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7년 4월 - 상하이촉성회 집행 위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7년 8월 19일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부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월 25일 -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33년 3월 14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1038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1038
학교|수학지 동명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40지도보기
활동지 대동청년단 - 부산광역시
활동지 동제사 - 중국 상하이
활동지 대한민국 임시 정부 - 중국 상하이
활동지 군사 통일 회의 - 중국 베이징
활동지 상하이촉성회 - 중국 상하이
활동지 한국독립당 - 중국 상하이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김녕(金寧). 아버지는 김석련(金石鍊)이고, 어머니 박옥(朴玉)이다. 1921년 작은아버지인 김세주(金世鑄)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조금이(趙今伊)와 결혼하여, 딸 김미리(金美理)와 아들 김정욱(金正旭)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갑(金甲)[1889~1933]은 1889년 1월 7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1038번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진원(金瑨源)이다. 1906년 4월 개양학교[1907년 12월 동명학교로 개편]에 입학하여 1910년 3월 동명학교를 2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이 무렵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에 안희제(安熙濟)를 비롯한 민족주의 청년들이 항일 운동을 목적으로 결성한 영남 최초의 비밀 결사이었다.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일은 항일 독립운동가 김갑의 인생에 중요한 계기를 형성하였다.

1917년 5월 20일 베이징대학[北京大学] 입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2년에 신규식(申圭植)이 주도하여 결성한 상하이 최초의 독립운동인 단체인 동제사(同濟司)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동제사에는 대종교 신자가 많았다. 김갑도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정(參政)·지교(知敎)·상교(尙敎) 등을 역임하였다. 김갑은 이후 대종교 본사가 국내에서 만주로 옮기자 상하이에 서도본사(西道本司)를 설치할 정도로 대종교에 심취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회 격에 해당되는 임시 의정원의 경상도 대표 의원이 되었다. 1919년 4월 22일 교통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이후 군무위원회 이사를 맡았으며, 법제위원회 등에 소속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업무 수행에 공헌하였다. 1919년 11월에 의열단(義烈團)이 결성되자 김갑도 가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에서 이동휘(李東輝)·신채호(申采浩)·장건상(張建相) 등과 함께 무력파, 즉 무장 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계파에 속하였다. 이 무렵 이승만(李承晩)이 미국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한국의 위임 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 독립 노선에 대한 비판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921년 4월 17일 베이징에서 무장 투쟁 노선을 주장하는 군사 통일 회의가 개최되자, 김갑도 참여하여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임시 의정원을 부정하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안으로 제시된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에서 재무 총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대조선공화국은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지만, 1923년 1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포함한 독립 운동의 방향을 재정립하려는 국민 대표 회의가 개최되자 김갑은 13도 총간부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어서 국민 대표 회의 참가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자격 심사 위원, 선언문 및 선언서 수정 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양분되자 개조파 간부로 활동하였던 김갑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고수파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개조하는 길에 매진하였다.

이에 1924년 4월에 법무 총장 대리 차장, 12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노동 총판, 1926년 2월 14일 국무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월 15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서 새로운 약헌의 기초 위원으로 선출되어 개헌 작업에 참여하였다. 1927년 8월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재정을 마련하려고 몹시 애를 썼다.

이 무렵 동북아시아에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항일 통일 전선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김갑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1927년 4월 11일 상하이촉성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결국 좌우가 분리되고 대립되면서, 1930년 1월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흥사단(興士團)을 중심으로 창당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조선 독립을 위한 활동에 동분서주하던 김갑은 1933년 3월 14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광제의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김갑의 나이 불과 45세이었고, 조국 독립의 여망을 품고 이역만리 중국으로 떠난 지 17년 만의 일이었다. 김갑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민장으로 엄수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6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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