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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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城大師影幀 |
영어의미역 | Protrait of Monk Yongsong-dang |
이칭/별칭 | 「용성 대종사 진영」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미경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일제 강점기 고승 용성(龍城)의 영정.
[개설]
고승 진영(高僧眞影)은 덕 높은 승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범어사는 창건 이래 많은 고승 대덕들을 배출하였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선찰 대본산(禪刹大本山)이란 이름 아래 민족 사찰로서 한국 불교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으며 근대 불교를 지향하는 발판을 다졌다. 「용성 대사 영정(龍城大師影幀)」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한국 근대 불교의 새벽을 연 선각자 용성당(龍城堂) 진종(震鍾)[1864~1940]을 그린 것이다.
용성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속성은 백씨이며, 이름이 상규(相奎), 용성은 법호이다. 용성은 14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화월(華月)을 은사로 모셨고, 1911년에는 서울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1919년에는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 운동에 힘썼다. 대각사 창건 후 많은 경전을 번역하고 용성선원에서 선의 대중화 시대를 여는 등 한국 불교의 근대화와 조국의 독립 등에 주력하였다. 범어사 내원암에 머물며 수선결사의 하나인 만일 결사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는데, 동산(東山)이 그의 제자이며 성철(性澈)도 용성의 법손으로 시봉하였다. 용성은 1940년 2월 24일 세수 74세에 입적하였다. 범어사에 「용성 대선사 사리탑 비명 병서(龍城大禪師舍利塔碑銘幷序)」[1941]가 남아 있다.
[형태 및 구성]
「용성 대사 영정」은 세로 124.4㎝, 가로 87.3㎝ 크기이며 비단에 채색을 베풀었다. 마치 사진을 보고 그린 것처럼 사진의 자세를 따른 듯 초상 사진의 취세(取勢)가 특징적인 근대 작품이다. 「용성 대사 영정」 속의 용성은 배경에 아무런 문양도 없는 의자상으로 그려졌는데, 현대풍이 느껴지는 의자에 앉은 자세는 거의 정면상처럼 보일 정도로 약간 왼쪽으로 비껴 앉은 구분면에 가까운 모습이다.
오른손으로는 술이 풍성한 불자의 손잡이를 잡고 있으며 왼손은 가사 속에 감추어져 있고, 장삼 아래로 비치는 두 발은 신을 신고 있지 않은 흰색 버선발이다. 운보문이 새겨진 흑갈색 장삼과 화문이 그려진 붉은 가사를 걸쳤다. 배경은 갈색으로 전체를 채색하였으며, 하단부에 음영으로 가로선을 표현하여 벽면과 바닥이 구분되어 보이도록 하였다. 「용성 대사 영정」 오른쪽에는 영제가 적혀 있고, 왼쪽에는 용성이 쓴 제찬이 있다.
[특징]
「용성 대사 영정」은 배경에 아무런 문양이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 교의 좌상으로 표현하였다. 얼굴은 우안 9분 면상이며 몸체도 정면에서 약간 틀어진 구분면에 가깝다. 의자 형태라든가 장삼과 가사 등에 그려진 문양 등은 근대풍이다. 일반 초상화에서는 개항기를 전후하여 사진을 찍어 초상화를 그리는 방식이 새롭게 등장하였는데, 「용성 대사 영정」의 안면 묘사나 손 표현 등에서 일반 초상화의 방식을 모방해 그린 점이 눈에 띈다. 「용성 대사 영정」 속의 용성은 안면에 주름살이 많지 않고 당당한 풍모가 6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용성이 직접 쓴 자찬이 있다. 용성이 입적하기 훨씬 전의 모습이 그려진 것으로 볼 때 「용성 대사 영정」은 20세기 초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용성은 한국 불교근대화에 초석을 다진 인물로, 20세기 전반 불교의 근대화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승려이다. 「용성 대사 영정」은 당대의 뛰어난 승려를 추모하여 그린 조사 진영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