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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180
한자 船餘寺-廢塔
영어의미역 Pagoda of Banyeosa Temple' site
이칭/별칭 선여사지 폐탑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탑과 부도,유물/유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공단2길 70-14[용수리 산144]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조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불탑
양식 삼층 석탑
재질 화강암
크기 상륜부: 61㎝[잔존 높이]|옥개석: 154×79.5×60㎝[부재①], 193×101×68㎝[부재②], 126×123.5×52㎝[부재③], 140×65×56㎝[부재④], 209×123×49.5㎝[부재⑤], 145×52.5×40㎝[부재⑥]|기단석: 124×124×65.5㎝[부재①], 121.5×152.5×91.5㎝[부재②], 124×124×107㎝[부재③], 123×94×93㎝[부재④]
소유자 석탑사
관리자 석탑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1년 - 석탑사 주변에서 석탑의 상륜부 석재 발견
이전 시기/일시 1981년 12월 30일 - 상륜부 석재를 수습하여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이전 보관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0~2004년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천에서 대규모 절터와 폐불들 발견
현 소재지 석탑사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산 144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4동 948-1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석탑사에 있는 선여사 터의 폐석탑재.

[건립 경위]

선여사 터 폐탑은 양식상 통일 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건립 경위는 알 수 없다.

[위치]

선여사 터 폐탑은 그동안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선여사 터에 세워졌던 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선여사 터기장군에서 가장 큰 가람으로서 절에 딸린 전답이 300석을 넘었다고 전한다. 『기장현 읍지(機張郡邑誌)』에도 기장현의 사찰로서 제일 먼저 선여사를 적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선여사의 사역(寺域)이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사역을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부산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탑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지표상에서 확인되고, 1981년에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釜山廣域市立博物館)이 현재의 석탑사 주변에서 석탑의 상륜부 석재를 수습함으로써 이곳에 큰 사찰이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러나 2000년부터 선여사를 찾기 시작하여 2004년 선여사로 추정되는 대규모 절터와 폐불들을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임기천 상류에서 발견하였다. 백운산(白雲山) 서쪽 산록의 해발 350~400m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선여사 터는 대략 네 곳으로 분산되어 있고 산록의 구릉 사이에 건물 터가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지표상에서는 건물 터의 초석들과 경주 옥석으로 제작된 모양이 각각 다른 다수의 불상편, 각종 기와편, 귀얄문의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이 다량 확인되었으며, 특히 자연석으로 만든 대형 맷돌이 발견됨으로써 당시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선여사 터정관읍이 아니라 철마면의 절터로 고증된다면 이 폐탑(廢塔)의 명칭도 고쳐져야 할 것이다. 현재 선여사 터 폐탑의 탑재는 백운산 기슭에 있는 석탑사 대웅전 옆 대지에 놓여 있다.

[형태]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이전하여 보관하고 있는 상륜부는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가 61㎝로 네모난 형태의 앙화(仰花)와 세 개의 보륜(寶輪)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복발(覆鉢) 이하 부분과 보개(寶蓋) 이상의 부분은 파손되었다. 앙화는 각 변이 34㎝로 네 잎의 연화가 조각되어 있으며 아래로 2단의 받침과 연결되어 있다. 보륜은 둘레가 각각 110.5㎝, 103㎝, 97㎝로 위로 갈수록 체감되며 두께는 8㎝가량이다. 상륜부는 현존하는 예가 드문 편인데 기본적인 형식은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 석탑 가운데 남쪽 탑의 상륜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선여사 터 폐탑의 상륜부는 장흥 보림사 삼층 석탑 남탑의 상륜이 석제 찰주(刹柱)를 만든 후 보륜을 따로 만들어 끼우는 방법으로 조성된 것에 비하여 앙화와 찰주가 일체로 조각되어 있으면서 보륜 3개를 양각한 형태이며 찰주가 지나치게 굵은 편이다.

옥개석 부재는 6개가 남아 있다. 옥개석 부재①은 전체 옥개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2단의 옥개 받침이 있다. 옥개석 부재② 역시 전체 옥개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4단의 옥개 받침이 있다. 옥개석 부재③은 전체 옥개의 1/3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5단의 옥개 받침이 있다. 옥개석 부재④는 전체 옥개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3단의 옥개 받침이 있다. 옥개석 부재⑤는 전체 옥개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낙수 면과 추녀 부분이 대부분 파손되었으며 4단의 옥개 받침이 있다. 옥개석 부재⑥은 전체 옥개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2단의 옥개 받침이 있다. 크기를 보면 부재①은 154×79.5×60㎝, 부재②는 193×101×68㎝, 부재③은 126×123.5×52㎝, 부재④는 140×65×56㎝, 부재⑤는 209×123×49.5㎝, 부재⑥은 145×52.5×40㎝이다.

기단석은 네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네 개의 기단석 모두 갑석(甲石)과 부연(附椽)을 표현하지 않았고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도 없다. 즉 방형의 돌덩이를 그대로 기단으로 사용하되 밖으로 노출되는 부위에는 돌을 다듬었으며 탑신을 받치는 굄 부분도 1단의 각형으로 다듬었다. 기단석의 아랫면은 가공하지 않았다. 크기를 보면 기단석의 부재①은 124×124×65.5㎝이며, 부재②는 121.5×152.5×91.5㎝, 부재③은 124×124×107㎝, 부재④는 123×94×93㎝이다.

[현황]

현재 석탑사 대웅전 옆에 있는 탑재는 원래 이곳이 아니라 석탑사로부터 위쪽 남서방향의 경사가 상당히 심한 지점에서 도괴(倒壞)되어 흩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석탑사가 조성될 무렵 이미 오래전에 도괴되어 있던 탑재를 굴삭기를 동원하여 석탑사 남쪽 언덕까지 옮겨 왔는데, 이때 탑재 속에서 사리 3과가 수습된 것을 사찰 중건을 담당하던 승려가 서울 모처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근에 다시 석탑사 대웅전 옆으로 탑재를 옮겼다. 탑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기단석편이 4점, 옥개석편 6점, 기타 파손이 심한 탑재들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런데 1981년 12월 30일 상륜부의 석재를 수습하여 현재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서 이전 보관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선여사 터 폐탑으로 알려진 석탑사의 탑재는 남아 있는 부재의 현상을 살펴보면 통일 신라 시대에 조성된 특수 양식의 석탑 가운데 기단부가 변화된 석탑의 하나로 추정할 수 있다. 선여사 터 폐탑의 기단부는 이 탑이 지닌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으로 네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갑석과 부연을 표현하지 않았고 우주와 탱주도 없으며 노출되는 부위만 돌을 다듬었을 뿐 바닥은 전혀 가공되지 않았다. 이러한 형태를 근거로 이 폐탑의 기단부를 추정하여 보면 큰 괴석을 하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네 개의 석재를 이용하여 상층 기단을 마련한 형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하층 기단이 존재하지 않고 단층 기단뿐이라면 현재 남아 있는 기단부의 높이가 탑신부의 높이와 비교하여 너무 낮아서 비례가 원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탑신부는 옥개석(屋蓋石)을 구성하는 4매의 돌만 남아 있고 옥신석(屋身石)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옥개석의 형태를 보면 대체로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 한 돌로 한 층의 옥개를 이루는 데 비하여 2매의 돌을 조합하여 하나의 옥개를 조성함으로써 옥개 구성에 차이를 보인다. 옥신석은 부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규격과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잘 다듬어진 입방체의 단층 기단을 가진 탑들은 모두 탑신부가 모전 석탑[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의 형식을 취하는 데 비하여 원형 또는 일부를 가공한 괴석을 갖춘 탑이나 상층 기단이 가구식(架構式) 기단인 탑은 우주와 면석을 갖춘 옥신과 경사진 낙수 면과 옥개 받침이 있는 옥개의 형식임을 감안한다면 이 폐탑의 옥신 형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폐탑의 상륜부는 일반적인 석제 찰주를 갖춘 석탑과 달리 찰주에 보륜을 모각한 독특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석탑사에 남아 있는 폐탑은 탑의 규모도 웅장할 뿐만 아니라 기단부의 형식 및 옥개를 구성하는 형식, 그리고 상륜부의 제작 방식 역시 같은 석제 상륜을 갖춘 석탑과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하여 선여사 터 폐탑은 부산 지역에 남아 있는 독특한 통일 신라 시대 석탑의 한 사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유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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