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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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喧 |
영어음역 | Yun Hwon |
이칭/별칭 | 차야(次野),백사(白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명호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차야(次野), 호는 백사(白沙). 증조할아버지는 윤희림(尹希琳)이고, 할아버지는 윤변(尹忭)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다. 어머니는 황대용(黃大用)의 딸이고, 부인은 심의겸(沈義謙)의 딸이다.
[활동 사항]
윤훤(尹喧)[1573~1623]은 1597년(선조 30) 정시(庭試) 문과 을과로 장원 급제하였다. 호조 좌랑을 지내고 1605년(선조 38) 동래 부사에 임명되어 약 2년간 재임하였다. 동래에 내려간 해 12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동래부 남문 밖에 송공단(宋公壇)을 조성하였다. 1612년(광해군 4) 황해도 관찰사로 재임 시 죄를 지어 압송당하는 김직재(金直哉)를 후대하였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그 후 복관되어 1624년(인조 2)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부체찰사(副體察使)가 되어 청나라 군대와 싸웠으나 안주를 빼앗겼다. 병력과 무기 부족 등으로 평양에서도 밀려나 성천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윤훤은 전세를 불리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 효시되었다.
[학문과 저술]
윤훤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서인 계열의 학통을 이었다. 문집으로 『백사집(白沙集)』이 있다. 1605년(선조 38) 동래 부사로 재임할 때 수영강 가의 동대(東臺)가 임진왜란으로 퇴락한 모습을 보고 「동대(東臺)」라는 시를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대담수벽연의(東帶潭水碧漣漪)[동대 깊은 물은 푸르고 고운 물결인데]
춘일엄화면육리(春日儼花綿陸離)[봄날 엄전한 꽃 땅에 이어질 듯 멀어지네.]
일자당년파가무(一自當年罷歌舞)[그해부터 한 번 가무를 그친 뒤에는]
폐원무주초이리(廢垣無主草離離)[버린 담에 주인 없고 잡초만 흩어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