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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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園雅集圖八曲屛風 |
영어음역 | Gathering of Xiyuan |
영어의미역 | Eight-part Folding Scree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현주 1 |
[정의]
조선 후기 동래부의 화사 이시눌(李時訥)이 그린 8폭 병풍 그림.
[개설]
『서원 아집도 8곡 병풍(西園雅集圖八曲屛風)』은 중국 송대 미불(米芾)의 「서원 아집도기(西園雅集圖記)」의 내용을 그린 고사도(故事圖) 계열의 병풍이다. 「서원 아집도(西園雅集圖)」는 중국 송나라 영종(英宗)[재위 1063~1067]의 사위였던 왕선(王詵)[1036~1089 이후]이 북송(北宋)의 수도 개봉(開封)에 있었던 자신의 정원인 서원(西園)에서 1087년 도사 진경원(陳景元)과 승려 원통 대사(圓通大師)를 포함하여 소식(蘇軾)[1036~1101], 소철(蘇轍)[1039~1112], 이공린(李公麟)[1040~1106], 미불[1051~1107], 황정견(黃庭堅)[1045~1105], 조보지(晁補之)[1053~1110], 진관(秦觀)[1049~1101] 등 당대의 저명한 문사 16명과 함께 열었던 모임을 그린 것이다.
이공린은 「서원 아집도」를 그렸고 미불은 이공린의 그림에 대한 「서원 아집도기」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서원 아집도」가 하나의 화제(畵題)로 자리 잡아, 명대와 청대까지 강남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조선에서는 남인계 인물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제작되어 18세기 이후 크게 성행하였는데, 대표작으로 김홍도의 「서원 아집도」가 전한다. 『서원 아집도 8곡 병풍』은 동래부의 화사 송암(松菴) 이시눌의 작품으로, 현재 독일 쾰른동아시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및 구성]
『서원 아집도 8곡 병풍』은 지본 담채(紙本淡彩)로 제작되었으며 화폭의 크기는 세로 518.0㎝, 가로 133.3㎝이다. 각 화면 하단에 서원 아집의 도상들이 그려져 있고, 화면 상단의 1/3 이상은 안개로 처리되어 있으며 미불의 「서원 아집도기」가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8폭에는 ‘세재갑인중동 송암작 초사제(歲在甲寅仲冬松菴作初史題)’라 적혀 있다. 『서원 아집도 8곡 병풍』의 화기(畵記)는 다음과 같다[( )는 누락된 글자이다].
“이백시효당소리장군위저색천석운물초목화죽 개묘절동인 이인물수발 각초기형 자유림하풍미 무일점진애기 불위범필야 기오모황도복착필이서자위동파선생 선도건자구이좌관자위왕진경 폭건청의거방궤이응저자위단양채천계 착의(이)시자위리단숙 후유녀노 운환취식 시립자연 부귀풍운 내진경지가희야 고송반울 후유능소화전락 홍록상간 하유(대석안 진설고기요금 파초위요 좌어석반방 도모자의 우수의석 좌수집권이관서자위소)자유 단건견의 수병초삽(이)숙시자위황로직 폭건야갈 거횡권화연명귀거래자위리백시 피건청복 무견이립자위조무구 궤이착석관화자위장문잠 도건소의 안슬이부시자위정정로 후유동자집령수장이립 (이인좌)어반근고회하 폭건청의 수수측청자위진소유 (금미관자도복발완자위진벽허) 당건심의 앙수이제석자위미원장 폭건수수이앙관자위왕중지 전유붕두완동봉고연이립 후유금석교 죽경료요어청계심처 취음무밀 중유가사(좌)포단이설무생론자위원통대사 방유폭건갈의(이)체청자위류거제 이인병좌(어)괴석지상 하유격단종류어대계지중 수석잔원 풍죽상탄 노연방뇨 초목자형 인간청광악불과차 차호 흉용어명리지장이불지퇴자기역득차야 자동파이하 범십유륙인 이문장의론 박학변식 영사묘묵 호고다문 웅호절속지자 고승우류지걸 탁연고치 후지람자 불독도화지가관 역족방불기인이(李伯時效唐小李將軍爲著色泉石雲物草木花竹 皆妙絶動人 而人物秀發 各肖其形 自有林下風味 無一點塵埃氣 不爲凡筆也 其烏帽黃道服捉筆而書者爲東坡先生 仙桃巾紫裘而坐觀者爲王晉卿 幅巾靑衣據方几而凝竚者爲丹陽蔡天啓 捉椅(而)視者爲李端叔 後有女奴 雲鬟翠飾 侍立自然 富貴風韻 乃晉卿之家姬也 孤松盤鬱 後有凌霄花纏絡 紅綠相間 下有(大石案 陳設古器瑤琴 芭蕉圍繞 坐於石盤旁 道帽紫衣 右手倚石 左手執卷而觀書者爲蘇)子由 團巾繭衣 手秉蕉箑(而)熟視者爲黃魯直 幅巾野褐 據橫卷畫淵明歸去來者爲李伯時 披巾靑服 撫肩而立者爲晁無咎 跪而捉石觀畫者爲張文潛 道巾素衣 按膝而俯視者爲鄭靖老 後有童子執靈壽杖而立 (二人坐)於蟠根古檜下 幅巾靑衣 袖手側聽者爲秦少游 (琴尾冠紫道服撥阮者爲陳碧虛) 唐巾深衣 昻首而題石者爲米元章 幅巾袖手而仰觀者爲王仲至 前有鬅頭頑童捧古硯而立 後有錦石橋 竹徑繚繞於淸溪深處 翠陰茂密 中有袈裟(坐)蒲團而說無生論者爲圓通大師 傍有幅巾褐衣(而)諦聽者爲劉巨濟 二人並坐(於)怪石之上 下有激湍潀流於大溪之中 水石潺湲 風竹相呑 爐煙方裊 草木自馨 人間淸曠樂不過此 嗟乎 洶湧於名利之場而不知退者豈易得此耶 自東坡而下 凡十有六人 以文章議論 博學辨識 英辭妙墨 好古多聞 雄豪絶俗之姿 高僧羽流之傑 卓然高致 後之覽者 不獨圖畫之可觀 亦足仿佛其人耳)”
[특징]
『서원 아집도 8곡 병풍』의 마지막 폭에 나타난 ‘갑인(甲寅)’은 화풍상 1794년 또는 1854년으로 생각된다. 이시눌의 작품 중 1834년이라는 기년명(紀年銘)[제작이나 사용 연시를 기록한 명문]이 존재하는 점이나, 화풍상의 완숙한 필치 등을 감안할 때 1854년이 타당할 것이다. 게다가 조선 후기에 제작된 다른 「서원 아집도」 병풍과는 달리 화면 상단에 일본 병풍의 영향으로 보이는 인위적인 안개 표현이 강조된 점은 왜관이 있었던 동래에서 거주하며 일본 구무품(求貿品)[무역을 요구하던 품목]을 제작했던 이시눌의 경험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서원 아집도 8곡 병풍』의 구성과 화풍은 기본적으로 1778년 김홍도의 『서원 아집도 8곡 병풍』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석벽에 글을 쓰는 미불의 등장, 그 다음으로 이공린과 소식 그룹, 비파를 연주하는 진경원과 설법하는 원통대사로 이어지는 인물 배치 순서는 물론 1~2폭에 표현된 홍살문과 그 왼쪽에 그려져 있는 문지기, 앞에 배치된 넝쿨 식물을 기르는 직사각형의 구조물, 5폭에 표현되어 있는 두 명의 시동, 소식 그룹 옆에 난간이 세워져 정원 내부를 구획한 점, 7~8폭에 홍예교 대신 편편한 돌다리를 배치한 점 등 여러 도상적 특징도 닮아 있다. 인물의 눈매 처리와 의복선, 배경 산수에서 피마준(披麻皴)[주로 산의 겉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산수화 준법으로 거친 질감을 가짐]에 변형된 미점(米點)[동양화에서 나무나 산수를 그릴 때 찍는 가로 점]을 사용한 마애(磨崖)[자연 암벽을 갈고 닦아서 문자나 화상을 새긴 것]를 표현한 점 등은 김홍도 필법은 물론 이시눌의 『농가월령 12곡병(農家月令十二曲屛)』과 상당히 유사하다.
[의의와 평가]
『서원 아집도 8곡 병풍』의 작가인 이시눌은 동래부의 화사이다. 「서원 아집도」는 중국의 이공린과 미불의 고사를 배경으로 그린 것으로, 문사적 취향이 강한 작품이다. 이시눌이 『서원 아집도 8곡 병풍』을 그렸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가 무관이었지만 문인적 기질을 가진 향반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김홍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시눌의 풍속화풍은 물론 일본의 영향을 받은 동래 지역 화풍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