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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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鳳雨 |
영어음역 | Yi Bongu |
이칭/별칭 | 백단(白旦),이봉우(李奉雨)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469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경주. 호는 백단(白旦). 한자 이름은 이봉우(李奉雨)로도 쓴다. 아버지는 이종만(李鐘晩)이고, 어머니는 이미의(李迷義)이다. 김혜정(金惠貞)과 결혼하여 아들 넷[이성신(李誠信)·이상필(李相弼)·이상준(李相俊)·이상덕(李相悳)]을 두었다. 둘째 이상필은 연길현 국자가 만세 시위에서 잡혀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셋째 이상준은 1920년 간도 용정에서 학생 운동으로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었다가 석방된 후 바로 광동군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독립학도군에 입대해 1927년 3월 항일 전투 중 전사하였다. 넷째 이상덕도 광동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셋째 형과 함께 1927년 3월 항일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활동 사항]
이봉우(李鳳雨)[1873~1921]는 1873년 7월 15일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성장하면서 일본어와 신문학을 배웠고 한말 궁내부 기사가 되었다. 그 무렵 국내 상황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국권을 회복할 활동을 고심하다 1908년에 간도로 가 연길현 합마당(哈蟆塘)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동포들이 거주하는 곳에 민족 학교와 강습소 설립에 힘을 기울였다. 아버지 이종만의 지원과 종교 단체들의 지원에 힘입어 1910년 김약연(金躍淵) 등과 화룡현(和龍縣) 장재촌(長材村)에 명동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12년 화룡현 자동(滋洞)에 김윤승(金允承) 등과 정동중학교(正東中學校), 화룡현 와룡동(臥龍洞)에 창동중학교(昌東中學校), 화룡현 소영자(小營子)에 길동중학교(吉東中學校)를 각각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육영 사업에 힘썼다.
또 1914년 북간도 장재촌에서 이동휘(李東輝)·구춘선(具春先)·마진(馬晋) 등이 조직한 국민회(國民會)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1918년 음력 11월 김교헌(金敎獻)·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김동삼(金東三) 등 39인이 무오 독립 선언을 할 때 북간도국민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무오 독립 선언은 1919년 3·1 독립 선언에 앞서 이루어진 것으로 큰 의의를 가진다.
이봉우는 국내의 3·1 운동 소식이 북간도에 전해진 3월 7일 용정촌·국자가 지역의 활동가들이 모여 비밀회의를 개최하고 북간도 지역의 독립 운동을 위한 통일체로 결성된 대한독립기성총회의 의사부원(議事部員)을 맡아 구춘선·마진·유예균(劉禮均)·최원일(崔元一)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만세 시위 당일인 3월 13일 용정촌·국자가 만세 시위 중 중국군이 발포한 일로 구춘선·강봉우(姜鳳雨)·고용환(高容煥)·강구우(姜九禹)·박승필(朴昇弼) 등과 함께 도윤공서(道尹公署)에 배상 책임을 따지기도 하였다.
이봉우는 용정촌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직후 길림성 북간도 지역인 연길현·화룡현·왕청현 세 현의 교민 대표를 결집하여 간도국민회를 결성하였다. 간도국민회는 동간도국민회와 훈춘국민회 등이 통합되어 설립된 단체로 회원이 약 8,000명이었다.
자유시 사변이 일어나자, 1921년 9월 구춘선(具春先)과 함께 국민회 대표로 재만 단체 성토문 및 군정 의회 선포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자유시 참변 후 난립한 재만 독립 단체의 통합이 절실함을 절감하고 항일 운동 단체의 통일적 규합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가던 중 1921년 9월 23일 연길현 노두구(老頭溝) 근처에서 일본 관헌에게 피살되었다.
[묘소]
중국 연길현 노두구(老頭溝)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80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