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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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世用 |
영어음역 | Bak Seyong |
이칭/별칭 | 박휘일(朴輝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 18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경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박재하이다. 항일 운동에 앞장섰던 박세현(朴世鉉)이 사촌 형이다. 여동생인 박인순은 초등학교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구금된 적이 있다.
[활동]
박세용(朴世用)은 1907년 8월 7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 182번지에서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박휘일(朴輝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성장 과정에서 사촌 형인 박세현의 영향을 받아서 항일 의식이 남달랐다. 박세현은 기장광복회[회장 김약수]의 총무이자 명정의숙(明貞義塾) 교장이었으며 1917년 옥사하였다. 박세용은 18세인 1925년 ‘우리도 술 담배 끊고서 잘 살아 보자’는 벽보를 만들어 기장 읍내 길가 집마다 붙이고 전단을 뿌렸다. 이 때문에 동래경찰서에 구금되는가 하면, 1928년 11월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징역 8월에 집행 유예 2년형을 받았다.
박세용은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도야마 시[富山市]에서 일본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전협도야마토건노조[全協富山土建勞組] 집행 위원으로 라미도야마방적노조, 북륙조선노조를 재조직하여 조선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31년 11월 30일 동료 15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33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나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경찰이 자행한 고문과 폭행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의 수감 생활이 불가능하여 1935년 6월 13일 가석방되었다. 이로부터 2개월 후인 1935년 8월 12일 옥고의 여독으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형무소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40여 통의 편지가 있다. 일부는 『기장 향토 문화 연구지』[1998년]에 게재되어 있으며 번역된 것은 기장향토문화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2006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