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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577
한자 吳澤
영어음역 O Taek
이칭/별칭 북성(北星),만춘(晩春),오혜영(吳慧泳),오회영(吳澮泳),오재영(吳哉泳),오준영(吳晙泳)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류지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재단법인 고계학원 이사
출생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3년 - 한문 서당 삼괴제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08년 - 부산진좌천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09년 - 사립명진학교 2학년으로 전학
수학 시기/일시 1912년 - 부산공립상업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구세단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0년 9월 14일 -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만주일보사 경남지사 인수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지원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상애회·보천교 타도 운동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신간회 부산지부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대중 숙박업소를 운영하며 일본에 가는 노동자 지원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서울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 정당통일기성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독립신문』 창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2월 -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독립신문』 양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박재혁 의사 추모회 개최 및 추모비 설립
몰년 시기/일시 1948년 8월 22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3년 3월 31일연표보기 - 독립 유공 훈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0년 9월 14일연표보기 -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
출생지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학교|수학지 사립명진학교 -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692-1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부산공립상업학교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지도보기
활동지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활동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묘소 망우리 공동묘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오직선(吳直善)이고, 어머니는 김순임(金順任)이다.

[활동 사항]

오택(吳澤)[1897~1948]은 1897년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부모가 한약방을 운영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1903년 한문 서당 삼괴제(三槐齊)에서 천자문을 배우며 학업을 시작하였다. 1908년 부산진 좌천학교에 입학하였고, 1909년 사립명진학교로 전학하였다. 16세 되던 해인 1912년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여 박재혁(朴載赫)·최천택(崔天澤)을 만나 형제 결의를 할 만큼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13년에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생인 오택박재혁·박홍규·김인태 등 10여 명이 중심이 되어 학생 비밀 결사 구세단(救世團)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단보를 발행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배포하는 활동으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 인물이 되었다. 오택은 이 활동으로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구세단의 해산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920년 9월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장의 처단을 계획하고 부산으로 잠입하자 오택·최천택 등은 정공단(鄭公壇)에서 제를 지내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오택박재혁의 폭탄 투척 의거에 거사 자금을 제공하고 폭탄의 보관을 담당하였다.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감행할 때 오택은 부산진예배당 앞에서 거사 상황을 주시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총포 화약 취체령 위반죄로 한 달가량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봉천에서 『만주 일보』를 발행하는 만주일보사 경남지사를 인수하여 신문 업무를 견습하면서 주식회사를 설립하려 하였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 금지된 기사가 게재된 신문을 시내에서 판매하다 구속되어 대구감옥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23년에 의열단원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후 부산으로 내려와 시대일보사 부산지국조선일보사 부산지국을 경영하는 등 꾸준히 언론과 관련한 활동을 벌였다.

1924년부터 일본으로 건너가려는 노동자들을 갈취하던 친일 단체 상애회에 반대하였고, 친일 사이비 종교 단체인 보천교 타도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9년에는 부산광역시 중구 대창동에 대중 숙박업소를 개업하여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려는 노동자들을 도왔다. 1927년 신간회 부산지회가 창립되자 선전부·조사연구부·서무부의 부원과 간사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31년 서울로 이주하여 이후 말년까지 대부분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1941년 최천택·김범부·최윤동·노기용·성학구 등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정당통일기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모환·김진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이듬해 2월 11일 종간호를 내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에 양도하였다. 1946년에는 부산으로 내려와 박재혁 의사 추모회를 개최하고 묘비를 세우는 등 친구이자 동지인 박재혁의 항일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어 상경하여 영우회(嶺友會)를 조직하고 재단법인 고계학원(財團法人高啓學院)의 이사가 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다 1948년 8월 22일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유고집』이 있다고 전해진다.

[묘소]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3월 31일에 독립 유공 훈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6.21 단순오탈자 수정 박재적의사비건립동지회 -> 박재혁의사비건립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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