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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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堂甘洞堂山祭 |
영어의미역 | Religious Ritual for the Mountain Spirit in Danggam-dong |
이칭/별칭 | 당감동 영숙사와 어모장군단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4동 710 |
집필자 | 김남희 |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4동에서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당감동 당산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 오전 10시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4동 710번지에 있는 당산에서 1년에 한 번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화합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이를 ‘당감동 영숙사(永肅祠)와 어모장군단(禦侮將軍壇)’이라고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영숙사에 모신 당산 신은 어모장군이다. 당감동은 고려 시대부터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마을의 안위를 위해서 어모장군비를 수호신으로 섬겼다. 어모장군사당기(禦侮將軍祠堂記)」에 의하면 1808년에 어모장군을 모신 사당(祠堂)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후 1825년에 마을 사람들이 새로이 영숙사를 세웠고, 1905년에 지금의 장소로 이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제당의 벽에는 1825년에 이횡주(李黌柱)가 쓴 「어모장군사당기」와 이홍규(李弘奎)가 1886년 감동도감을 맡았을 때 쓴 이건기(移建記)와 신우황(辛禹晃)이 1905년에 쓴 「어모장군사당 이건기(禦侮將軍祠堂移建記)」 및 1931년에 쓴 중수기가 붙어 있었으나, 이들 모두는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의 단비(檀碑)는 1990년 11월 25일에 건립된 것이다.
「어모장군사당기」[전13행]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군기혁명전대인야공명사업필재청한이일월침구/ 병화루경백세지하막능계고기불석재단이고로지언/ 어모장군사자추이명지동평고지현야이기변어남고천필송/ 장군어차이시왈여유어모자시의기무탈어백세지상이능유문어백세지하재장군지어자토약숙자지현산공명지용강/ 이당세어모지사천지지지장군지지야상금영관지시성이도언립춘지일례이영언이차언지비도확어병마이역위신/ 어가색야일경뢰이녕지기비주신이능지호백성뢰이경지기/ 비전준이능지호생진자토불가위불무사향자토불가위불령/ 무차령의호거인지준분이묘당지휘비야기어섬추지공/ 제중지력불위불다막언난기차두공부소위장사영웅/ 루만금야인위지축왈전기어모금역어모오호장군/ 만세어모(將軍豈革命前代人也功名事業必載靑汗而日月浸久/ 兵火屢經百世之下莫能稽古豈不惜哉但以古老之言/ 禦侮將軍四字推以明之東平古之縣也以其邊於南故天必送/ 將軍於此而詩曰予有禦侮者是矣豈無奪於百世之上而能有聞於百世之下哉將軍之於茲土若叔子之峴山孔明之龍崗/ 而當世禦侮之事天知地知將軍知之也尙今迎官之時誠以禱焉立春之日禮以迎焉以此言之非徒確於兵馬而亦爲神/ 於稼穡也一境賴而寧之豈非主神而能之乎百姓賴而耕之豈/ 非田畯而能之乎生鎭茲土不可謂不武死享茲土不可謂不靈/ 武且靈宜乎居人之駿奔而廟堂之翬飛也其於殲酋之功/ 濟衆之力不爲不多邈焉難記此杜工部所謂長使英雄/ 淚滿襟也因爲之祝曰前旣禦侮今亦禦侮嗚呼將軍/ 萬世禦侮).
도광오년을유삼월이십팔일 여주유학 이횡주 기(道光五年乙酉三月二十八日 驪州幼學 李黌柱 記)/ 도감남원유학 양시익(都監南原幼學 梁始翼)/ 유사(有司) 최인(崔演)/ 목수(木手) 감친한(甘進漢).”
[신당/신체의 형태]
단비의 규모는 대지 73㎡[22평, 앞면 7.6m, 옆면 9.6m]이고, 안에 어모장군단비가 세워져 있다. 단비[가로 52㎝, 세로 145㎝, 두께 24㎝]는 두 단의 화강석 기단에 오석[검은색 돌]으로 만들어 세웠다. 앞면에는 ‘어모장군단’이라는 비문을 새겼다. 옆면과 뒷면에 「영숙사단비기(永肅祠壇碑記)」가 윗단에는 한문으로, 아랫단에는 한글로 쓰여 있다. 이 단비는 두 단의 화강석대[기단은 앞면 90㎝, 옆면 61㎝, 높이 11㎝, 2단은 앞면 72㎝, 옆면 43㎝, 높이 7㎝]에 세워져 있다. 제단은 단비 앞에 있는데, 화강암 제단[앞면 108㎝, 옆면 73㎝, 높이 28㎝]으로 네 개의 둥근 받침돌 위에 있고, 제단 앞에는 향로단[앞면 39㎝, 옆면 17㎝, 높이 17㎝]이 있으며, 방향은 남향이다.
단비 앞에는 제를 모시는 화강암 제단(祭壇)이 네 개의 둥근 받침돌 위에 얹혀 있고, 제단 앞에는 향을 올리는 단이 있다. 단비 주위로는 높이 150㎝의 블록 담장이 직사각형으로 둘러쳐져 있고 그 안에 도토리나무, 포구나무, 감나무, 향나무 등 8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서쪽으로는 철제문이 있다.
[절차]
원래 제사는 매년 한 차례 음력 정월 초하루 저녁 8시 무렵에 모셨으나, 1970년대 말부터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정월 대보름 오전 10시에 모신다. 제관은 예전에는 마을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선정했으나 지금은 마을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하여 정한다. 당산제를 지내기 전의 제관은 세속적인 부정을 가시기 위해 육(肉) 고기와 술을 일절 먹지 않으며, 남의 길흉사에 참석하지 않는 등 금기를 지킨다. 제의 비용은 50만 원 정도 든다. 제물은 제반, 떡[팥 시루떡], 돼지머리, 나물, 자반 3~4가지, 과일 등을 준비한다. 진설과 절차는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대체로 같으나 제사 때 축문 대신에 『당산경(堂山經)』을 읽고 난 뒤 비손한다. 제사는 당산제만 지낸다.
[부대 행사]
제사가 끝나면 당산제 때 올린 제물을 약간씩 떼어 제당 주변에서 잡귀 잡신들을 불러 먹이는 시석을 한다. 시석을 마치고 나면 제사가 모두 끝나고, 참여한 사람들이 제당 안에서 함께 음복한다.
[현황]
단비는 당감4동에 위치하고 있는 신일교회 뒤에 있다. 단비의 옆면과 뒷면에는 「영숙사단비기」가 한문·한글로 병기되어 있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동평현(東平縣)은 부산의 근본지이다. 본래 대증현(大甑縣)이라고 하였으나, 신라 경덕왕 16년에 동평현으로 고쳤다. 부산이란 이름도 동평현의 관내에 있는 산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당감동은 본래 동평현의 치소(治所)이다. 당감이란 말은 당검(堂儉)으로 성황신을 말하며, 성황신은 곧 이곳의 수호신을 말함이다. 옛날 우리나라의 신앙은 신교(神敎) 사상이 주류가 되어 가는 곳마다 수호신으로 성황신을 모시고 있다. 유독 당감동의 수호신을 어모장군(禦侮將軍)이라 함은 필시 옛날 동평현의 성주가 어모장군의 관품에 해당하는 무관이 도임하였으므로 그 위용과 공덕이 민간에 반영되어 신격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말선초에 왜구가 창궐하여 연해의 성주들은 무장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성민들은 성주를 의지하고 우러르고 존중하여 이러한 관념이 오래되매 드디어 어모장군의 신상이 성립됨이 아닌가 한다. 1825년에 동민들이 어모장군의 사당을 새로 세우고 영숙사라 하여 기문(記文)을 남겼는데 그 축사(祝詞)에 “지금까지 왜적을 막아 왔으니 아아 장군이시여 만세토록 왜적을 막아 주소서.”라고 하였고, 1905년 사당을 이건(移建)할 때 또한 기문이 있어 “읍(邑)에 사(祠)가 있고, 동리에 당(堂)이 있음은 모두 심신을 맑게 하여 춘추로 재액(災厄)을 가시고 복을 구하는 소치”라고 하였으니 지금 사당은 허물어지고 그 자취만 남은지라 이제 동민의 합심으로 단비(壇碑)를 다시 세워서 길이 경모(敬慕)의 뜻을 표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변함없이 우리들을 수호하여 주옵소서.
1990년 경오(庚午) 11월 25일 창원(昌原) 정중환(丁仲煥) 근기(謹記)/ 월성(月城) 박명찬(朴明讚) 근서(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