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20 |
---|---|
한자 | 金泰燁 |
영어음역 | Gim Taeyeop |
이칭/별칭 | 돗빠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노동 운동가이자 민족 운동가.
[가계]
할아버지는 김규홍이고, 아버지는 김두한(金枓翰)이다. 항일 운동가 김두봉(金枓奉), 김약수(金若水)와 먼 일가이다.
[활동 사항]
김태엽(金泰燁)[1902~1985]은 1902년 12월 13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태엽이 어린 시절, 할아버지 김규홍이 기장군의 이방에서 물러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후 김태엽의 가족은 진주와 남원 등지를 전전하다가 1910년에 전라도 운봉군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차례대로 사망하자 김태엽은 1915년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처음 도착한 곳은 공업 도시 오사카[大阪]였다. 이곳에서 민족 차별과 노동 현장의 열악한 실태를 체험하면서 노동자의 현실에 눈뜨게 되었다. 특히 1916년 일본의 우애회[뒤에 일본노동총동맹, 현 사회당으로 합류]의 노동 강좌를 들으며 노동자 의식을 키웠다. 1920년 도쿄[東京]로 이주하여 주변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다. 먼저 3월에 세이소쿠가쿠엔고등학교[正則学園高等学校] 야간반에 들어가 대학 입학을 준비하였고, 6월에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김태엽은 계림장에서 양주동(梁柱東), 안막(安漠), 김우진(金祐鎭) 등과 교우하였다.
1922년 김태엽은 북풍파 사회주의자 이헌 등과 함께 재동경조선노동동맹(在東京朝鮮勞動同盟)을 결성하였다. 이후 김태엽은 조선인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박해가 극에 달하자 1924년 3월 10일 오사카에서 조선인 대학살 사건 규탄 대회를 개최하였다. 1924년 오사카에서 관서 지방 조선인노동동맹을 결성하였고, 1926년 6월 부산현(富山縣)에서 백의노동신우회를 결성하여 맹렬하게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감시와 탄압 속에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항거하는 김태엽을 일제 경찰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질서의 파괴자 혹은 사회를 소란케 하는 자’라는 뜻으로 돗빠라고 불렀다. 실제로 김태엽은 1923년 12월, 1936년 9월 두 차례 일본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1939년 12월에 다시 일본으로 갔다.
김태엽은 1944년 12월 귀국한 뒤에도 계속하여 노동 운동에 주력하였다. 1946년 3월 10일 서울에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 설립되자 부산지구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948년 정부 수립 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정치도구화에 반대하여 1949년 7월에 부산지구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김태엽은 일제 강점기 이래 노동 운동의 대의를 경제 투쟁에 한정하였고, 이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은 물론 보수적인 정당과도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이후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붕괴한 후 1961년 1월 장건상(張建相)을 당수로 결성된 혁신계 정당인 혁신당의 부위원장으로 잠시 몸담았지만 곧 사임하였다. 1980년대에 사회 민주주의 계열의 정당인 사회당[1980년]과 사회민주당[1985년]의 고문을 지냈다. 1985년 5월 6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