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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399
한자 尹善道
영어음역 Yun Seondo
이칭/별칭 약이(約而),고산(孤山),해옹(海翁)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30-3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시인
성별
본관 해남
대표관직|경력 공조 참의
출생 시기/일시 1587년 6월 22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7년 - 함경도 경원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18년 - 기장으로 옮겨짐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해배, 의금부 도사에 임명, 사직
활동 시기/일시 1628년 - 별시 문과 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8년 - 영덕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39년 2월 - 해배
활동 시기/일시 1657년 - 예조 참의, 동부승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함경도 삼수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67년 - 해배
몰년 시기/일시 1671년 6월 11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75년 2월 - 이조 판서에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78년 9월 - 시호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2005년 4월 27일 - 시비 건립
출생지 동부 연화방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대학로
거주|이주지 경원 - 함경북도 경원군
거주|이주지 기장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지도보기
거주|이주지 해남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거주|이주지 영덕 - 경상북도 영덕군
거주|이주지 고산촌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거주|이주지 보길도 -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묘소|단소 해남 -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181
관련 유적 삼성리 일광해수욕장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40-3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기장 지역에서 유배 생활을 한 문신이자 시인.

[가계]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 윤유기(尹惟幾)이고, 어머니는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구운한(具雲翰)의 딸이다. 친아버지는 경주 부윤을 지낸 윤유심(尹惟深)이고, 친어머니는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안현(安玹)의 딸이다. 부인은 남원 윤씨(南原尹氏)로 윤돈(尹暾)의 딸이다. 자녀는 2남 3녀 외에 측실에게서 2남 3녀를 보았다. 해남 윤씨(海南尹氏)는 해남 지역의 명문 거부로, 여러 명의 고위 관료를 배출하였다.

[활동 사항]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1587년 6월 22일 한성 동부 연화방[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대학로]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작은아버지인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가 유교 경전과 역사, 의약(醫藥), 복서(卜筮), 음양(陰陽), 지리(地理) 등을 두루 공부하였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읽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26세이던 1612년(광해군 4) 봄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12월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을 벌할 것과 유희분(柳希奮), 박승종(朴承宗)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

국경 지대의 귀양지에 중국인과 내통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618년(광해군 10) 죄인들을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윤선도도 경상남도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기장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학을 닮아 황학대로 불린 바위를 자주 찾았으며, 마을 뒤 봉대산에서 약초를 캐 주민들을 보살피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察訪)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봉림 대군(鳳林大君)[후에 효종],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스승이 되었다. 그 뒤 5년간 공조 좌랑, 형조 정랑, 한성부 서윤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윤선도는 의병을 모아 강화도로 가다가 길이 막혀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인조(仁祖)가 청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하여 이듬해 2월 제주도로 떠났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보길도(甫吉島)에 잠시 내렸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섬에 눌러앉기로 하였다. 윤선도는 자신이 머물던 마을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하고 격자봉 아래에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선도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 서울에 돌아가서 임금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1638년(인조 16) 경상북도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2월 풀려났다. 그 후 10여 년 동안 보길도의 부용동과 금쇄동의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금쇄동을 배경으로 한 「산중 신곡(山中新曲)」과 「산중 속신곡(山中續新曲)」, 1651년(효종 2) 한글 연시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을 지었다.

66세 때인 1652년(효종 3) 임금이 과거의 스승을 예우하여 특별히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하였고, 뒤이어 예조 참의, 공조 참의,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하지만 1657년(효종 8) 서인의 모략으로 벼슬자리를 내놓고 경기도 양주 고산촌(孤山村)[현 남양주시 수석동]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 무렵 「시무 팔조소(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 확립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승하하자 임금의 능을 쓰는 문제와 자의 대비(慈懿大妃)의 상복 기간을 둘러싸고 윤선도가 속한 남인과 송시열(宋時烈)이 이끄는 서인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남인이 패해 윤선도는 또 다시 함경도 삼수(三水)에 유배당했다. 1665년(현종 6) 전라도 광양으로 옮겨졌다가 2년 뒤에 풀려났다. 윤선도는 80이 넘은 나이에 보길도로 내려가 머물다가 1671년(현종 12) 6월 11일 낙서재에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윤선도는 경원에 유배되었을 때 「견회요(遣懷謠)」[회포를 푸는 노래] 5수와 「우후요(雨後謠)」[비온 뒤의 노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경원에서 기장으로 옮겨 가던 길에 「희증로방인(戲贈路傍人)」[장난 삼아 길가 사람에게 지어 주다]와 「답홍헌조랑(答洪獻趙娘)」[홍헌의 조 낭자에게 답하다] 등 두 수의 한시를 지었다. 기장에서는 1618년(광해군 10) 「영일일화(詠一日花)」[하루살이 꽃을 읊다], 1621년(광해군 13) 「제김장군전후(題金將軍傳後)」[『김장군전』의 뒤에 쓰다] 3수, 「증별소제(贈別少弟)」[작별하는 동생에게 주다] 2수, 「병중 견회(病中遣懷)」[아플 때의 그리움], 「영계(詠鷄)」[닭을 읊다], 「차임박사이평사운 봉증봉황대주인(次任博士李評事韻奉贈鳳凰臺主人)」[임 박사 및 이 평사를 차운하여 봉황대 주인에게 올리다] 등 5제 8수를 남겼다.

「영일일화」는 다음과 같은 시다.

갑일화무을일휘(甲日花無乙日輝)[오늘 핀 꽃 내일이면 광채 없으니]

일화수향양조휘(一花羞向兩朝暉)[한 송이 꽃이 이틀의 아침 햇살 보기 부끄러워서라네.]

규경일일여풍도(葵傾日日如馮道)[해바라기 날마다 풍도(馮道)처럼 기울어지나니]

수변천추사시비(誰辨千秋似是非)[누가 천추(千秋)에 옳고 그름 분별하리오.]

이 시의 제목에는 기장에 이배된 후인 무오년[1618]이라는 주(註)가 달려 있다. 풍도는 중국 후주(後周) 때 여러 명의 군주를 섬겨 비난을 받았던 사람이다. 윤선도는 자신을 하루살이 꽃[一日花]에, 벌을 청했던 이이첨과 유희분·박승종을 풍도에 비유하였다. 마지막 구의 ‘누가 천추에 옳고 그름 분별하리오’는 훗날 누군가가 자신의 유배에 대해 잘잘못을 가려 줄 것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증별소제」의 첫째 수는 다음과 같다.

약명신천격기산(若命新阡隔幾山)[명(命)에 따른 유배길[新阡]은 수많은 산 너머요]

수파기내난생안(隨波其奈赧生顏)[세파를 따르자니 부끄러운 얼굴 어찌하리오]

임분유유천행루(臨分惟有千行淚)[헤어지자니 천 가닥 눈물이 흘러내려]

쇄이의거점점반(灑爾衣裾點點斑)[네 옷자락에 점점이 얼룩져 적시는구나.]

위 시의 ‘소제(少弟)’에는 ‘공의 서제(庶弟) 선양(善養)’이라 주가 달려 있다. 선양은 윤유기의 서자로, 윤선도의 이복 동생이다. “금계(金鷄) 중추(仲秋) 이십오일에 삼성대(三聖臺)에서 전송하며 지었다”는 주를 통해 1621(광해군 13)년 8월 21일 기장 삼성대에서 동생과 작별하며 쓴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의 말미에는 “돈을 바치고 풀려나는 일이 있었으니, 세파를 따른다는 것은 이것을 가리킨다”라는 부연 설명도 붙어 있다. 윤선도는 경제적으로 넉넉했기에 돈을 바치고 풀려날 수도 있었지만 길고도 외로운 유배 생활을 감내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증별소제」의 둘째 수이다.

아마비비여마지(我馬騑騑汝馬遲)[내 말은 분주하고 네 말은 더디건만]

차행나인물추수(此行那忍勿追隨)[이 행차에 어찌하여 차마 따라갈 수 없는가]

무정최시추천일(無情最是秋天日)[가장 무정한 것은 가을의 시간으로]

불위리인주소시(不爲離人駐少時)[이별하는 사람을 위해 잠시도 머물지 않구나.]

동생 윤선양(尹善養)은 느린 말을 타고 돌아가고 있다. 윤선도는 동생 것보다 빨리 달리는 말이 있지만 같이 갈 수 없다. 유배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동생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별하는 사람을 위해 가을날의 시간이 잠시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시귀로 동생과 헤어지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병중 견회」

거이어매기여오(居夷禦魅豈余娛)[궁벽한 곳 유배 생활 내 어찌 즐겁겠는가]

연국회선매자우(戀國懷先每自虞)[나라 연민과 조상 생각에 매양 스스로 걱정할 뿐]

막괴유산이주고(莫怪踰山移住苦)[산 넘어 이주하는 고생은 괴로워 말게나]

망경유각일중무(望京猶覺一重無)[한양 쪽 바라볼 때 오히려 막힘 없음을 알리니.]

윤선도는 유배 생활 중에도 나라를 걱정하고 조상을 생각하였다. 귀양지에서 병에 걸렸는데, 병중에 산을 넘고 있다. 산을 넘으면 한양 쪽의 시야가 막힘 없이 틔어 있기 때문이다. 한양의 집을 그리워하는 지은이의 마음이 전해 오는 시다.

윤선도의 시문은 문집 『고산 선생 유고(孤山先生遺稿)』에 실려 있고,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로 구성된 연시조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윤선도정철(鄭澈), 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 3대 가인(三大歌人)으로 일컬어지는데, 가사(歌辭)는 없고 시조[단가]만 지은 점이 독특하다.

[묘소]

윤선도의 묘는 전라남도 해남군 구산면 문시리 문소동[현 현산면 구시리 산181]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75년(숙종 1) 2월 이조 판서에 증직(贈職)되고, 1678년(숙종 4) 9월 충헌(忠憲)의 시호를 받았다. 기장군청과 고산윤선도선생 시비건립위원회에 의해 2005년 4월 27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일광해수욕장에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가 세워졌다. 시비에는 「증별소제」와 「병중 견회」가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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