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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342
한자 金炯斗
영어음역 Gim Hyoungdoo
이칭/별칭 일경(一耕)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병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언론인
성별
대표경력 『국제 신문』 사장
출생 시기/일시 1910년 2월 15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2년 - 철성의숙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24년 - 고성공립보통학교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26년 - 진주공립농업학교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30년 - 니혼대학 전문부 중퇴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동맹 휴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매일 신문』 기자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부산 일보』 통신부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민주 신보』 편집국장 겸 발행인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수산 신문』 인수 후 『산업 신문』 설립, 이후 『국제 신보』로 명칭 변경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세계통신사 대표 이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경남부산야구협회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9년 - 경남체육협회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75년 - 동방해상화재보험주식회사 회장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77년 8월 26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6년 9월 20일 - 일경언론문화재단 설립
추모 시기/일시 1997년연표보기 - 일경언론문화재단에서 일경 언론상 제정
출생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교사동 635
학교|수학지 철성의숙 - 경상남도 고성군
학교|수학지 고성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고성군
학교|수학지 진주공립농업학교 - 경상남도 진주시
학교|수학지 니혼대학 - 일본 동경
활동지 『부산 일보』 - 부산광역시지도보기
활동지 『민주 신보』 - 부산광역시
활동지 『산업 신문』 - 부산광역시
활동지 세계통신사 - 부산광역시
묘소 모란 공원 -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기업가.

[가계]

호는 일경(一耕). 1910년 2월 15일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교사동 635번지에서 중농인 아버지 김석권과 어머니 해주 오씨의 큰아들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김형두(金炯斗)는 어린 시절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소학(小學)』, 『대학(大學)』 등 한학을 공부했고, 1922~1923년 향리의 사학인 철성의숙(鐵城義塾)에서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민족 교육을 받았다. 1924~1926년 고성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하고, 1926년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같은 해 광주 학생 사건과 관련하여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본의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에 입학하지만 1930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동아일보 고성지국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는 공산당 재건 운동 사건에 말려 7개월간의 옥고도 치렀다. 1935~1939년 『매일 신보』 기자를, 1939~1945년 『부산 일보』 통신부장으로 일하였다. 1945년 9월부터 1946년까지 부산에서 창간된 『민주 신보』 편집국장과 발행인을 맡았다. 1947년 9월 1일 주간 『수산 신문』을 인수하여, 『국제 신보』의 전신이 된 『산업 신문』을 창간하였다. 1950년 8월에 제호를 『국제 신보』로 바꿨는데, 당시 발행 부수가 10만 부를 넘어섰다. 6·25 전쟁 당시 『국제 신보』는 AFP통신, 로이터통신 등과 특약을 맺어 국내에서 유일하게 외국 신문 기사를 제공하는 신문이 되었다. 김형두는 1962년까지 국제신보 사장으로 일하였다.

1953년 그는 국제신보의 자매 회사인 세계통신사를 설립해 1958년까지 사장으로 지내면서, 일간 『세계 통신』을 발행하였다. 1958년 지방지 최초로 조간과 석간을 발행했고, 1959년 7월엔 대교로 2가에 새 사옥을 짓고 이전하였다. 그는 1960년대 들어서 3·15 부정 선거와 4·19 혁명 등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신문인으로서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당시 『국제 신보』는 서민을 대변하고 정권을 비판하는 정론지로서 주가를 올렸다.

김형두는 1960년에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지만 『부산 일보』와 피나는 소모전을 벌인 끝에 경영난을 겪게 되고 1961년 4월에는 신문을 며칠 동안 발행하지 못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결국 김형두는 1962년 9월 『국제 신보』의 경영권을 넘겨주고 언론계를 떠났다. 이외에도 삼양전기 회장, 1954~1964년 경남부산야구협회 회장, 1961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9년 경남체육협회 회장, 동해해상화재보험주식회사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7년 8월 26일 67세로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 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동료와 후진들이 뜻을 모아 1996년 9월 20일 김형두의 호를 딴 일경언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1997년부터 언론 발전과 사회에 공헌한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일경 언론상을 수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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