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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300
한자 姜槿虎
영어음역 Gang Geunh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서용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북로군정서 중대장
출생 시기/일시 1898년 11월 3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6년 - 함흥중학교 재학
수학 시기/일시 1920년 - 신흥무관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중국 둥베이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3·1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관 및 구대장으로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9월 - 청산리 전투 참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이르쿠츠크 고려혁명군관학교 교관으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연길의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소 교관으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49년 2월 - 육군사관학교 8기 입교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6·25 전쟁 참전
활동 시기/일시 1956년 5월 - 중령으로 전역
몰년 시기/일시 1960년 2월 24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건국 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00년 4월 -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추모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5년 4월 - 애국지사강근호선생 기념사업회 발족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0년 9월 - 청산리 전투 참전
출생지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
거주|이주지 중국 길림성 일대
거주|이주지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영도구
학교|수학지 함흥중학교 - 함경남도 함흥시
학교|수학지 신흥무관학교 -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활동지 북로군정서 - 중국 길림성
활동지 이르쿠츠크 고려혁명군관학교 -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
활동지 대한민족청년단 중앙 훈련소 - 경기도 수원시
활동지 육군사관학교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관련 유적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추모비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지도보기
관련 기관/단체 애국지사강근호 선생기념사업회 - 부산광역시

[정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6·25 전쟁 때 부산 지역에 거주한 군인.

[가계]

아버지는 강형석(姜亨錫)이고, 어머니는 신해운(申海雲)이다. 아내는 이정희이다. 이정희는 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시영(李始榮)의 증손녀이며 6·25 전쟁 중에 학도 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하여 강근호를 만났다. 슬하에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활동사항]

강근호(姜槿虎)[1898~1960]는 1898년 11월 3일에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함흥중학교에 진학하였으며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6년[당시 19세] 반일(反日) 학생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중국 둥베이[東北]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길림성 용정촌의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교관과 구대장을 지냈으며, 1920년 9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제1중대장으로 크고 작은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가 독립군의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경신참변[간도 참변]을 일으키자 일제의 무자비한 학살을 피해 러시아의 자유시로 건너갔다. 하지만 1921년 6월 발생한 자유시 참변으로 러시아 적군(赤軍)에 편입되었고 이후 이르쿠츠크(Irkutsk)의 고려혁명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대 중반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길림성 일대에서 유랑 생활을 하며 용정촌의 영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해방 직전에는 연길의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소 교관으로 있으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소식을 접한 강근호는 조국이 해방되고 2년이 지난 1947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수원에 있던 대한민족청년단 중앙 훈련소의 교관으로 있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52세인 1949년 2월 육군사관학교에 8기[특별 4차]로 들어갔다.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참전하였고, 이후 육군 제103사단 113연대장을 지낸 후 1956년 5월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전역 후 부산 영도에 정착해서 살다가 1960년 2월 24일에 63세로 사망하였다.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애국 지사 묘역에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00년 4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 장산 폭포사(瀑布寺) 인근에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추모비가 건립되었으며 2003년 9월에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물로 지정되었다. 또한 평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바친 강근호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2005년 4월 애국지사강근호선생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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