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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245
한자 李萬夏
영어음역 Yi Manha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29-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성별
본관 광주
대표관직 경상 좌수사
활동 시기/일시 1692년 - 경상 좌수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94년 - 남병사에 임명
부임|활동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경상 좌수사를 지낸 무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아버지는 이계도(李繼道)이고, 아들은 이희진(李喜震), 이희겸(李喜謙), 이희태(李喜泰), 이희복(李喜復), 그리고 서자 이희장(李喜杖), 이희석(李喜惜) 등이다. 아들 이희겸이 무과에 급제한 1689년(숙종 15)의 방목[『기사 원자 정호 증광 별시 문무 전시 방목(己巳元子定號增廣別試文武殿試榜目)』]에는 이희겸이 과의교위(果毅校尉) 품계를 갖고 있고, 이만하는 절충장군 품계에 부산진 첨사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이희태는 병조 정랑에 올랐다.

[활동 사항]

이만하(李萬夏)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내영지(萊營誌)』의 선생안(先生案)에는 이만하가 서천 군수(舒川郡守)에서 승진하여 1692년(숙종 18) 10월 24일에 경상 좌수사로 부임하였고, 1694년(숙종 20) 2월에 남병사(南兵使)에 임명되어 경상좌수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상 좌수사로서 이만하의 업적은 경상좌수영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이다. 1652년(효종 3) 지금의 수영구 수영동에 지어진 경상좌수영성은 1907년(순종 1) 혁파될 때까지 약 240년간 존속하였고, 동래부에서 가장 중요한 수군 기지였으므로 수차례 개축과 증축이 이루어졌다. 이만하는 부산진 첨사를 역임하여 경상좌수영의 군사적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좌수영지(左水營誌)』의 성지 조(城池條)에는 “임신년 개축할 때 동북의 옹성 2곳, 파괴된 여장(女墻) 327타 중 198타는 좌수영의 3척이 담당하고, 66타는 2선이 담당하며, 63타는 포이포에서 담당한다[壬申改築時 東北甕城二庫 毁破三百二十七垜內 一百九十八垜 營三隻次知 六十六垜 二船次知 六十三垜 包伊次知]”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문과 북문의 옹성 2곳과 전체 여장의 87%에 달하는 327타를 새로 쌓은 것이다.

여러 문헌에 1692년(숙종 18) 경상좌수영성 개축은 좌수사 문희성(文希聖)이 주도하였다고 되어 있었으나 이것은 ‘임신(壬申)’이라는 간지를 잘못 계산한 탓이다. 문희성은 임신년인 1632년(인조 10) 경상 좌수사로 부임하였고, 1633년(인조 11) 우병사(右兵使)에 임명되어 경상좌수영을 떠났다. 경상좌수영성을 크게 증축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한 사람은 이만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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