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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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夏得 |
영어음역 | Gim Hadeuk |
이칭/별칭 | 연각(硯覺) |
분야 |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상로 82[초량동 296-2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부산 출신의 교육자.
[활동 사항]
김하득(金夏得)[1904~1981]의 호는 연각(硯覺)으로, 1904년 6월 27일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기장보통학교[현 기장초등학교]를 거쳐, 1921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년 3월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과 대학]를 졸업하였다. 그해 10월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고, 1939년 1월 함흥 영생중학교로 옮겼다. 이후 부산으로 이주하여 1941년 4월 동래고등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 교사 및 교감을 역임하였다.
1945년 10월 경남고등여학교[현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 1947년 6월 모교인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1949년 3월 부산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6년제이던 중등 교육 과정이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바뀌어 1950년 6월 부산중학교가 부산고등학교와 부산중학교가 분리되면서 김하득은 부산고등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4년 문화교육부의 한글 간소화 정책에 반대하여 부산시 중등 학교 전 교원이 제출한 연판장에 대표로 서명하여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1956년 5월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 학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 9월 25일 6·25 전쟁 당시 유엔군에 징발되어 서전병원으로 사용되던 남구 대연동의 부산수산대학 교사(校舍)를 돌려받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60년 4·19 혁명으로 김하득의 교직 생활에 위기가 닥쳤다. 이승만 정권 아래서 부산대학교,부산수산대학, 해양대학 총장과 학장을 지낸 인사들에 대한 지역 사회 및 학생층의 불신과 거부감이 커 그해 5월 부산수산대학 학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얼마 후 부산사범학교와 부산사범대학을 합쳐서 만든 부산사범대학 학장에 임명되었고, 1963년 3월 부산교육대학으로 승격한 뒤 초대 학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정년 퇴임하였다. 김하득의 정년 퇴임을 기념하여 동료 교수들과 후학들이 『보리를 밟는 마음』을 발간하여 헌정하였다. 이후 1968년 부산시 교육회 회장을 지내는 등 교육계에서 활동하다가 1981년 6월 6일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1929년 이후 영생여학교와 영생중학교에서 12년 동안 생물과 수학을 가르치면서 성천강을 비롯하여 함흥 일대와 장진강 유역 부전호의 담수어(淡水魚)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훗날 담수어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7년에 부산시 문화상[교육 부문]을 받았고, 1968년 청소년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킨 공로로 교육 훈장을 받았다. 1993년 부산중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 기념 문집 『진리의 창문가에서』를 발간하고, 성금을 모아 교정에 김하득의 흉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