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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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敏夫 |
영어음역 | Gim Minbu |
이칭/별칭 | 김병석(金炳錫)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종찬 |
[정의]
부산 출신의 시조 시인.
[활동 사항]
김민부(金敏夫)[1941~1972]는 1941년 3월 14일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김병석(金炳錫)이었으나 부산중학교에 입학하여 김민부(金敏夫)로 바꿨다. 성남국민학교 재학 시 두 차례 월반하였고, 공동 출제 중학교 입시에서 부산 최고 점수를 받아 수재 소리를 들었다. 부산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56년 8월 첫 시집 『항아리』를 펴냈다. 1957년 1월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석류」가 입선하였고, 이듬해 1월 『한국 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균열」이 당선되어 시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석류」는 후에 작곡가 장일남(張一男)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 널리 불렸다.
김민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하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하였다. 이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1962년 졸업하였다. 김민부와 서라벌예술대학 동기인 시인 이근배(李根培)는 “문학계에 계급이 있다면, 내가 일등병, 김민부는 사성 장군 같은 존재”라며 김민부의 시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1963년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로 개칭] 시 분과 위원장을 맡았으며, 부산문화방송에 프로듀서로 입사하여 방송용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방영되고 있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인 「자갈치 아지매」[1964]와 「가요 반세기」 등은 김민부가 제안하고, 글을 쓴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결혼 이듬해인 1965년 서울문화방송으로 옮겼고, 이후 동아방송, 동양방송 등에서 방송 작가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장일남의 부탁으로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노랫말을 지었다.
방송용 글을 쓰면서도 순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김민부는 1968년 틈틈이 쓴 시를 모아서 시집 『나부와 새』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여 힘닿는 데까지 책을 다시 거둬들인 바람에 『나부와 새』는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본이 되었다. 1970년 오페라 「원효 대사」의 대본을 써서 김자경오페라단에서 상연하기도 하였다.
1972년 10월 27일 토요일 김민부는 연말 특집용 방송 원고 3천 장을 써야 해서 굉장히 예민해져 있었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자택에서 저녁을 먹던 중 김민부는 부인과 언쟁을 벌인 뒤 방문 열쇠를 창밖에 던져 놓고는 석유난로를 발로 걷어차 불이 났다. 이 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고 이틀 뒤 세상을 떠났다. 김민부의 나이 서른한 살 때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10월 김민부의 오랜 친구였던 조용우(趙鏞祐)[『국민 일보』 초대 발행인, 현 명예 사장]가 김민부의 작품을 모아서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 주오』를 발간하였다. 2011년 10월 27일 제1회 김민부 문학제[추진 위원장 강달수 시인]가 『부산 일보』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와 병행하여 10월 28~30일 용두산 공원에서는 김민부 추모 시화전이 열렸다.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암남 공원 입구에 「기다리는 마음」 시비가 있다.
[학문과 저술]
시집으로 『항아리』[1956], 『나부와 새』[1968]가 있고, 대표작은 「석류」[1957], 「균열」[1958]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