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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119
한자 薛相英
영어음역 Seol Sangyeong
이칭/별칭 설영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133번길 16[범일동 830-3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연극인
성별
대표경력 제3대·7대·8대 부산연극협회장
출생 시기/일시 1934년 2월 2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7년 - 부산중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부산수산대학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청문’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59년~1975년 - 부산 MBC 라디오 드라마 연출
활동 시기/일시 1963년 7월 - ‘새들’ 창립 동인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63년 10월 - 부산아동극센터 지도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5년 - 부산시 문화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66년 9월~1969년 1월 - 3대 부산연극협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72년 2월~1976년 1월 - 7대·8대 부산연극협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81년~1985년 - 서울문예회관 초대 관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88년 - 부산문화회관 공연 과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2002년 12월 5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경상남도 창원시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830-31
학교|수학지 부산중학교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부산수산대학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3동 599-1지도보기
활동지 부산MBC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활동지 입체극단 - 부산광역시
활동지 새들 - 부산광역시
활동지 부산연극협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서울 문예 회관 - 서울특별시
활동지 부산 문화 회관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848-4지도보기

[정의]

부산 지역 현대 연극의 1세대 연극인.

[개설]

설상영(薛相英)[1934~2002]의 예명은 설영. 아버지는 설형식이고, 어머니는 김재남이다. 1934년 2월 2일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아버지 설형식이 공의(公醫)로 일했던 탓에 어린 시절 설상영은 아버지의 전근지를 따라 사천·대구·부산 등지로 다녔고, 사천에서 1945년 8·15 광복을 맞았다. 1947년 설상영부산중학교[현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산에 첫 발을 내디뎠다.

[활동 사항]

부산중학교 연극부에서 활동하면서 연극에 눈을 뜨게 된 설상영은 4학년 때 연극 부장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마침 6·25 전쟁이 터지자 설상영은 다른 학교 연극부와 함께 정훈공작대를 만들어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연극 공연에 나섰다. 전쟁이 끝난 후 학제 변경으로 중학교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뉘자, 부산고등학교 1회로 복교하였다. 부산고등학교에서 설상영은 학도호국단 학예 부장으로 연극부를 조직하고, 미술반·문예반·음악반 활동을 통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진주 개천 예술제에서 수상하기도 하였다. 1954년에는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에 진학하여 ‘청문극회’에 가입하고,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연극 활동에 몰두하였다.

1955년 설상영은 부산의 첫 동인 극단인 ‘청문’을 창립하고, 오페레타 「구원의 곡」으로 창립 공연을 개최하였다. 1950년대 부산 지역의 사회 극단은 청문과 예술소극장뿐이라고 할 만큼 이 시기 부산 연극계에서 청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1959년 부산MBC가 창사되자 설상영부산MBC 라디오 드라마의 프리랜서 연출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3여 년 후 운영하던 ‘문화연탄’을 정리하고 부산문화방송에 드라마 프로듀서로 입사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창설되면서 한국연극협회 부산지부가 조직되었다. 한형석이 초대 지부장을, 박두석(朴斗錫)이 2대 지부장을 역임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이를 실무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설상영이었다. 이 무렵 부산 연극계는 극도로 침체되어 부산 연극 자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졌고, 이에 설상영은 부산문화방송 성우들을 주축으로 ‘입체극단’을 만들었다.

1963년 7월에는 아동극단 ‘새들’의 창립 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앞서 1950년대 한형석의 ‘자유 아동 극장’에도 관여했던 설상영은 이 시기에 눈에 띠게 활발해진 아동극의 개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63년 10월 24일에 발족한 부산 아동극 센터에 지도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또 설상영은 1966년 9월부터 1969년 1월, 1972년 2월부터 1976년 1월까지 한국연극협회 3대·7대·8대 부산지부장[부산연극협회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 부산문화방송을 퇴사한 설상영은 극단 ‘독립무대’를 만들고 새로운 양식의 연극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활동은 자금난으로 난관에 봉착하였으며, 1978년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이후 설상영은 문예진흥원에서 일하다가, 1981년 설립된 서울 문예 회관의 초대 관장으로 취임하여 1985년까지 5년간 재임하였다. 1988년 부산으로 돌아온 설상영부산 문화 회관의 공연 과장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서울 교육 문화 회관 극장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독립 예술 기획사 ‘IMG’를 운영하면서 「사운드 오브 뮤직」·‘러시아 아이스발레단 한국 공연’·‘러시아 오브라숍 인형 극단 초청 공연’ 등 공연을 기획하였다. 부산 현대 연극의 기틀을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던 연극인 설상영은 2002년 12월 5일 고희 기념 작품으로 「탈선 춘향전」을 기획하던 중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설상영이 연출한 대표 작품으로 「장남의 권리」[부산사범학교, 1954]·「밤 12시」[김관봉 작, 입체극단, 1964. 12]·「연이야 울지마」[이주홍 작, 입체극단, 1964. 12]·「만선」[천승세 작, 1965. 9]·「흑도」[김행오 작, 1972. 6]·「올가미」[유한수 작, 극단 독립무대, 1976. 2. 19]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5년 부산 연극인 합동 공연인 「만선」을 연출하여 부산시 문화상 창작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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