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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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理文 |
영어음역 | Gang Imu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영미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한국 무용 평론의 1세대이자 무용 이론 정립의 선구자.
[활동 사항]
강이문(姜理文)[1923~1992]은 1923년 함경남도 서천에서 태어났다. 1936년 함경북도 학남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함경남도 함흥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일본대학 척식과를 수료한 뒤 일제 학도병 징용을 피해 만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무궁화 신생』의 편집장을 역임하면서 문예 창작 분야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무궁화 가무 단장[1945년]을 맡기도 하였다.
강이문이 부산에 정착하게 된 시기는 6·25 전쟁으로 피난 오면서부터이며, 그 시절 초량에서 고문서 책 장사를 하며 많은 서적을 접하게 되었고, 무용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혼미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가 저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강이문의 등장은 부산 무용 근대사에 간과할 수 없는 무용 이론 1세대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강이문은 무용은 몸으로만 구사한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무용을 관조하면서 탁월한 문장력으로 표현하고 무용에 대한 사관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 한성여자초급대학[현 경성대학교]에 무용 미학 강좌를 개설하여, 대학에서 무용 미학·무용 개론·무용사 등의 강의가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춤의 이론적 뒷받침에 신경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1973년에 전국 최초의 직업 무용단으로 기록되는 부산시립무용단을 창단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초대 부산시립무용단 부단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74년에 한국문화진흥원 공연 사업이 개설되어 부산에서도 그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합동 공연이 이루어졌으며, 그가 직접 기획과 연출을 맡았다. 그리고 1979년 처음으로 부산여자대학에서 무용학과가 문을 열어 체계적인 춤 교육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강이문의 노력 덕분이었다. 한국의 무용 평론 1세대이며 무용 이론 정립의 선구자인 강이문은 1992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58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부산 일보』에 총평인 「창작 무용」상·중·하가 연재되었고, 논문으로 「한국 신무용사 연구」[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1969]가 있다.
[상훈과 추모]
추모 기념으로 민족미학연구소가 『한국 무용 문화와 전통』-강이문 춤 비평론집1[현대미학사, 2002]과 『우리 춤의 전통과 창조성』-강이문 춤 비평론집2[현대미학사, 2002]를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