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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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拓號北洋出漁 |
영어의미역 | Gaecheokho Sail out for Fish in the North Ocean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석만 |
[정의]
1981년 부산항에 장기간 계류 중이던 고려원양 개척호가 북양 출어를 재개한 사건.
[역사적 배경]
북양(北洋)은 북태평양을 지칭하는 것으로 러시아와 캐나다, 미국, 일본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의미한다. 한국이 이 먼 바다에 진출하여 원양 어업을 시작한 것은 1966년이다. 수산청의 지원 아래 부산수산대학 실습선 백경호[389톤]가 연어·송어 유자망(流刺網)어업과 저서어족(底棲魚族)의 트롤 어업을 시험 조업한 것이 효시이다. 1968년 한국수산개발공사가 602 강화호[1,400톤급]를 출어시킨 것이 뜻밖의 성적을 올리자 원양 어업은 크게 각광을 받아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발전하였으며, 1976년에는 83척이 출어하여 48만 톤의 어획량을 올렸다.
개척호는 이러한 원양 어업의 급성장을 배경으로 당시 대표적인 원양 어업 회사였던 고려원양이 197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구입한 선박이다. 2만 7000톤급 대형선으로 같은 선단(船團)에서 잡은 생선을 저장·가공하는 공모선(工母船)의 역할을 하였다. 1974년부터 출어했으며, 원양 어선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으므로 한국 원양 어업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1977년 미국과 소련이 200해리 경제 수역을 선포하여 외국 어선의 어로 행위를 금지시키자 북양에 출어하는 원양업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원양업계는 베링 해 공해 수역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동부 해역으로 출어하여 대응했지만, 대형선으로 막대한 출어 비용이 드는 개척호는 수지 타산을 맞추지 못해 부산 남항에 4년 동안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개척호가 한미 합작 조업 계획에 따라 북양 출어가 다시 가능해지자 1981년 1월 7일 원양 어업을 위해 재출항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개척호의 북양 출어는 당시로서는 원양 어업 부활의 신호탄처럼 인식되어져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경과]
고려원양의 개척호는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의 어로 제한 조치 등의 제약을 받기는 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 북양 어업을 지속하였다.
[결과]
1990년대에 들어 원양 어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고려원양 역시 1992년 부도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의의와 평가]
국내 최대의 원양 어업 회사 고려원양과 그 소속선으로 국내 최대 원양 어선인 2만 7000톤급 개척호는 부산을 근거지로 한국 고도 성장기 수출의 일익을 담당했던 원양 어업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