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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931
한자 乃台事件
영어의미역 Students’ raid into Senior Col. Nodai’s Hous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 3가 21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대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노다이|동래중학교|부산제2상업학교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0년 11월 23일연표보기 - 제2회 경남 학도 전력 증강 국방 대회 개최
종결 시기/일시 1940년 11월 23일연표보기 - 가두시위 해산
발단 시기/일시 1940년 11월 23일 - 노다이 심판장의 편파 판정
전개 시기/일시 1940년 11월 23일연표보기 - 노다이 관사 습격
발생|시작 장소 부산 공설 운동장 -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 3가 210지도보기
종결 장소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종결 장소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정의]

1940년 부산의 동래중학교,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이 전개한 항일 학생 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 전쟁을 일으킨 후 식민 통치 안정을 위해 일본 경찰과 경찰의 보조 기관인 경방단원을 크게 증원시켰다. 특히 일제의 침략 전쟁에 필요한 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각종의 동원령도 내렸다. 이러한 일제의 전시 체제 강화는 급기야 조선 학생들의 군사 교련 훈련의 강화를 낳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1940년 11월 23일 제2회 경상남도 학도 전력 증강 국방 대회가 개최되었다.

[경과]

1940년 11월 23일 부산, 마산, 진주, 인근 지역 학생들을 모집하여 제2회 경남 학도 전력 증강 국방 대회가 개최되었다. 제1회 경남 학도 전력 증강 국방 대회에서 조선인 학교인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가 우승하였기 때문에 경상남도 전역의 일본인 학교 교관들은 제2회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인 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하여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마지막 장거리 구보 행군을 남겨둔 상태에서, 동래중학교의 우승은 확실해졌다. 구보 행군에서 동래중학교가 실격하더라도 총점에서 부산중학교를 0.5점 앞서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총점을 계산한 결과 뜻밖에 부산중학교가 1위로 확인되었다. 이에 동래중학교의 김영근 교사와 학생들은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 대우에 단체로 항의하였다. 그러나 심판장 노다이[乃台]는 “심판의 판정은 신성하고 절대 불가하므로 판정을 따르라”며 김 교사와 학생들의 항의를 일축하였다.

분노한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은 운동장 밖으로 나가 정렬한 뒤 보수동으로 내려오며 「황성 옛터」와 우리 민요를 부르며 행진을 하였다. 학생들의 안위를 걱정한 김영근 교사의 해산 권유도 듣지 않고 학생들은 그대로 영주 터널 오른쪽에 위치한 노다이의 집으로 몰려가 돌 세례를 퍼부었다. 일련의 사건이 끝난 뒤 오후 10시경 학생들은 해산하기 시작하였지만, 부산헌병대에서 각 경찰서에 지시를 내려 귀가하는 학생들을 대거 검거하였다.

[결과]

노다이 사건으로 인하여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 총 200여 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일본 관헌의 압력에 못 이겨 두 학교는 자체적으로 학생 처벌을 실시하였다. 그 숫자는 퇴학 총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이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 항일 학생 의거는 일제 강점기 말기의 전시 체제하에서 전개된 대규모 학생 투쟁이다. 사건 발생 당시 일제의 보도 통제로 타 지방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만약 보도가 되었다면 전국적으로 훨씬 큰 파급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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