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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859
한자 駕洛迫間農場小作爭議
영어의미역 Tenancy Disputes at Hajama’s Farm in Garak
이칭/별칭 가락 소작 쟁의,박간 농장 소작 쟁의,하자마 농장 소작 쟁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 운동
관련인물/단체 김해농민조합|배종철|한성봉
발단 시기/일시 1928년경 - 하자마 가츠오가 농장 매수
전개 시기/일시 1930년 6월연표보기 - 모심기 거부 투쟁
전개 시기/일시 1931년 11월 9일 ~ 10일 - 하자마 농장 소작인, 부산 하자마 본점 앞에서 연좌시위
전개 시기/일시 1932년 1월 26일 - 하자마 본점 앞 2차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36년 4월 20일 - 해포도 농장 사무소 앞 시위
발생|시작 장소 둔치도 -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
발생|시작 장소 해포도 -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하자마 본점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2가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의 하자마 농장에서 전개된 소작 쟁의.

[역사적 배경]

경상남도 김해 진영 하자마 농장[迫間農場] 소유주인 하자마 가츠오[迫間一男]의 아버지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는 부산 최고의 땅 부자이자 ‘조선 재계의 중진’으로 불리었던 재벌이다. 그는 부산 개항 4년 후인 1880년 오사카의 한 무역상의 부산 지점 지배인으로 한국에 건너와, 주로 토지·가옥 등 부동산에 투자하여 자본을 축적하였다.

조선 총독부토지 조사 사업이 완료되고 산미 증식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1920년대부터 하자마 후사타로는 농지에 집중 투자를 시작했는데, 동래, 김해, 밀양, 산청, 진주, 울산, 사천, 부산, 마산, 창원 등 경상남도 각지는 물론 멀리 전라북도 남원, 전라남도 해남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농경지를 확보하였다. 그중에서도 핵심 농지는 김해군 진영면창원군 대산면·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 농장이며, 이웃한 김해군 가락면의 해포도·둔치도[현재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도 농장이 있었다.

해포도와 둔치도서낙동강의 퇴적토로 형성된 삼각주로, 한말까지만 해도 갈대와 억새풀이 우거진 저습지였다. 특히 둔치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는데, 일부 이주 농민에 의해 개간이 시작되던 것을 일제 강점기 들어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제방을 쌓고 지번을 붙여 일반인들에게 불하하였다고 한다. 하자마 집안에서 둔치도와 해포도의 거의 전 지역을 사들일 때, 그 명의자가 하자마 후사타로의 아들인 하자마 카츠오였다고 하니, 그가 진영 농장을 인수한 1928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자마가 해포도·둔치도의 새로운 주인이 되자, 이 지역 농민들은 모두 하자마의 소작인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해포도에는 농장 사무소와 농장원 숙소 등 관련 시설이 들어섰는데, 현재 폐교된 가락초등학교 해포 분교 일대에 위치했다고 전한다. 실제로 해포도에는 아직 철거되지 않은 일식 가옥이 남아 있어, 하자마 농장의 과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하자마의 농장 경영 방식은 이웃한 진영 농장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진영 농장에서 하자마는 경영 첫해부터 생산량의 5할로 되어 있는 소작료를 7할로 인상하고자 했으며, 작황에 따라 소작료를 조정하는 조정지(調定地)에서 작황에 상관없이 일정액을 납부해야 하는 정조지(定租地)로 소작 형태를 변경하려 하는 등 압박을 가하여 소작농들로부터 큰 불만을 샀다.

또한 소작권을 앞세워 소작료가 명기되어 있지 않은 소작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하거나, 정조지의 소작료를 증액해 달라, 혹은 조정지에서 정조지로 변경해 달라는 청원서를 소작인에게 써서 제출하도록 강제하는 등 매우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작지에 비싼 금비를 시비하도록 강제하면서, 그 비용까지 소작인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겼다. 이러한 기형적 농장 운영 방식에 대한 조선인 소작인들의 불만은 농장 인수 이듬해인 1929년부터 본격적으로 신문지상에 보도되면서 쟁의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경과]

1930년 6월 중순 해포도의 하자마 농장 사무실에 배종철, 허성도 등 수백 명의 조선인 농민들이 모여 모내기도 거부한 채 지배인 등 농장 관계자들을 상대로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 확립[소작 기간 보장] 등의 요구 조건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나아가 소작권 몰수 등으로 탄압을 가하자 농민들은 농장 사무실에 대한 집단 항의와 물꼬 헐기 등의 방식으로 저항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 김해 시가지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군중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1931년 11월과 1932년 1월에는 각각 50여 명과 200여 명의 농민들이 야간을 이용하여 낙동강을 건너 부산 동광동의 하자마 본점까지 몰려가서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1931년의 제1차 시위는 ‘소작료를 수확된 벼의 절반으로 할 것’, ‘소작권을 확립할 것’, ‘비료 대금을 절반으로 할 것’ 등을 요구하였는데, 이미 전국적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던지 농장 측이 소작인의 요구 사항을 거의 수용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 후 쟁의단 간부에 대한 검거와 소작권 박탈, 비료 대금의 일방적 지불 청구 등으로 농장 측이 재차 역습해 오자, 1932년의 제2차 시위로 이어졌고, 결국 강제 해산 당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들이 두 차례의 소작 쟁의를 주로 ‘진영 농장’에 초점을 두고 보도하였기 때문에, 현재까지의 연구들은 김해농민조합과 진영 농장만을 주목하여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부 향토지 등에 의하면 해포도·둔치도 등 김해군 내의 여타 하자마 농장의 농민들도 김해농민조합의 지도 아래 소작 쟁의에 가담하였다고 하므로, 이에 대한 보다 면밀한 연구가 요구된다. 1931, 1932년 시위에 비해 영향은 미미하였으나, 1936년에도 해포도 농장에서 한차례의 소작 쟁의 사실이 확인된다. 즉, 4월 20일 약 300명의 소작 농민이 해포도 농장 사무소를 포위하고 소작료 감하를 요구하며 대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과]

1931년과 1932년 두 차례에 걸친 하자마 본점 기습 농성은 제2차 시위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로 끝났으나, 이후 구금당한 쟁의단 간부에 대한 탈환 투쟁으로 이어져, 결국 소작권 박탈의 폭거를 철회시키는 성과를 낳았다. 또한 1934년 공포된 조선 농지령에서 소작 계약을 최저 3년으로 한다고 명문화하는 데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1936년 해포도 농장의 소작 쟁의에서 1934년 소작료를 수확의 절반으로 하기로 했으나 여전히 4·6제가 고수되고 있음에 대해 항의한 것을 보면, 1930년대 초의 집중적 시위 이후에도 하자마 농장의 고율 소작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소작 쟁의 역시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해포도·둔치도 농장을 비롯한 김해군 내 하자마 농장의 소작 쟁의는 일제 강점기 남한에서 가장 치열했던 농민 운동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당시 일본의 관변 기록에는 김해농민조합 간부 배종철, 한성봉 등의 선동에서 기인한 것으로 쟁의의 성격을 규정하였으나, 근래의 연구는 김해농민조합의 조직적 지도보다 소작인 스스로 일본인 지주, 나아가 식민지 권력에게까지 전선을 확대해 간 것으로 평가한다. 어떠한 시각이 옳든 당시 김해의 농민들이 부당한 식민지 농업 현실에 대해 각성되어 있었음은 틀림없다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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