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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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圭元 |
영어음역 | Gim Gyuw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읍내로78번길 13[동부리 189]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경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규원(金圭元)[1925~2002]은 1925년 1월 8일에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189번지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 아마가사키[尼崎]에 있는 관서학원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학년 때 일본인들의 멸시와 민족 차별 행위, 재일 한국인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면서 민족의식을 각성하였다. 1943년 6월경부터 독립 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지식 계층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단결을 호소할 목적으로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1943년 6월 초순 조선총독부 총무국 문서과에 근무하던 학우 서원수에게 “나는 조선 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자네도 이에 협력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어서 8월에 귀국하여 서원수를 직접 방문해 독립 운동에 나설 것을 격려하였다. 같은 시기에 부산 해운대에서 철도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지우와 일본 아마가사키에 거주하는 친구에게 각각 “조선 동포의 구제를 위하여 조선 청년은 끝까지 노력하자.”는 내용의 서신과 “조선 민족의 행복은 독립 이외에는 없으니 우리 청년들은 독립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는 방법으로, 국내외의 지우들에게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김규원은 1943년 10월 28일 일본 효고 현[兵庫縣] 가와니시[川西]의 천서항공기회사 작업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44년 9월 11일 고베지방재판소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 받고 1년 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여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68년에 포항제철(주) 상무 이사를 지냈다. 2002년 1월 16일에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3년에 건국 포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