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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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仁樹 |
영어음역 | Nam Insu |
이칭/별칭 | 최창수(崔昌洙),강문수(姜文秀)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창욱 |
[정의]
6·25 전쟁 때 부산 지역을 무대로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가수.
[개설]
남인수(南仁樹)[1918~1962]는 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진주의 강씨 문중으로 개가(改嫁)하여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강문수(姜文秀)로 이름을 바꾸었다. 진주 제2공립심상소학교[현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사이타마 현[埼玉縣]에 있는 전구 공장에 취직한 후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노동자 생활을 이어갔다.
[활동 사항]
1930년대 초반 남인수는 가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1932년 박시춘의 「애수의 소야곡」[오케레코드]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는데, 이는 애초 박시춘이 작곡한 「눈물의 해협」을 개사한 리메이크 곡이었다. 강문수라는 이름도 이때 ‘남인수’로 바꾸었다. 이후 남인수는 1천여 곡 이상의 노래를 발표하고, 「감격 시대」·「낙화유수」·「울며 헤진 부산항」·「가거라 삼팔선」·「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이 가운데 1940년에 발표한 「울며 헤진 부산항」은 정신대에 끌려가는 여성들, 징용과 지원병으로 고향을 떠나가는 청년들이 남몰래 눈물 흘리며 부를 만큼 비극적 노래였다. 하지만 일제 말기에 남인수는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지원병 제도를 지지하는 「그대와 나」[1942년]·「이천오백만 감격」·「혈서 지원」[1943년] 등의 군국 가요를 부르고, 1944년 9월 미국과 영국 격멸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부민관에서 열린 「성난 아세아」에 출연하는 등 친일 행위에 가담하였다.
6·25 전쟁 때 남인수는 피난지인 부산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1953년 남인수는 또 하나의 대표적 히트곡인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발표하였다. 유니버설레코드가 제작한 이 노래는 6·25 전쟁으로 인한 피란민의 애환과 3년 세월의 아픔과 서러움이 진솔하게 묻어나는 노래였다. 특히 이것은 마치 열차의 쇠 바퀴가 굴러가는 것 같은 금속성의 규칙적인 울림과 가슴 속의 공명 효과, 남인수의 애간장을 끓이는 창법 등이 어우러져 절창의 세계를 이루었다. 「울며 헤진 부산항」·「이별의 부산정거장」은 남인수의 대표작으로, 격동의 근현대와 더불어 ‘부산’의 장소성(場所性)을 진솔하게 확인시켜 주는 노래이기도 하였다. 1962년 6월 26일 남인수는 불과 45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꼬집힌 풋사랑」·「감격 시대」·「낙화유수」·「울며 헤진 부산항」 등 8백여 곡을 해방 전에 불렀고, 해방 후에는 「가거라 삼팔선」·「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2백여 곡을 취입하였다. 모두 1,00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장재동 산 49번지에 있다. 1962년 치러진 장례는 가요계 최초로 연예협회장으로 엄수되었고, 이날 장례식장에는 남인수의 출세작인 「애수의 소야곡」이 장송곡 대신 연주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4년 진주 진양호 기슭에 남인수를 기리는 ‘남인수 노래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2001년에는 기념비 옆에 동상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