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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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警察署爆破事件 |
영어의미역 | Explosion of Busan Police St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로85번길 15[동광동 2가 10-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1920년 9월 14일 의열단원인 박재혁(朴載赫)이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
[역사적 배경]
1919년 3·1 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속에서 1919년 11월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보다 강력한 방법 채택을 결의한 의열단이 만주에서 결성되었다. 김원봉(金元鳳)을 단장으로 한 의열단은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의 암살과 탄압 기구인 조선총독부 청사, 동양척식회사, 각 경찰서 폭파 등 일제 통치 근간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국내 거사를 위해 1920년 4월부터 폭탄을 국내[밀양, 진영]로 반입하다 밀정의 제보로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면서 단원과 국내 협력자 중 20여 명이 검거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 항거로 부산경찰서 폭파 계획이 세워졌다.
[경과]
박재혁은 부산 출신으로 1919년 상해로 가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을 다니며 무역 활동을 하였는데 이즈음 중국에서 의열단원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김원봉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박재혁은 김원봉의 권유로 군자금 300원을 받고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로 결심하였다. 1920년 9월 상순에 중국 고서로 짐을 꾸리고 그 밑바닥에 폭탄을 감추어 상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9월 13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동지인 최천택을 만나고 다음날 14일 하오 2시 부산경찰서로 가서 하시모토[橋本秀平] 서장에게 면회를 청하였다. 2층 서장실에서 서장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고서를 구경시켜주는 척하며 폭탄을 투척, 서장은 오른쪽 다리에 중상을 입고 혼절했으며 박재혁도 다리에 중상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결과]
폭탄 투척 후 중상을 당한 박재혁은 그 자리에 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재혁은 부산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1921년 5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다시 상고하여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박재혁은 일제에 대한 항거로 단식을 결심하고 결국 1921년 5월 21일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은 의열단이 최초로 성공시킨 거사였으며 이후 의열단도 단원확충을 통한 조직 강화 작업을 계속하여 지속적인 항거로 들어갔다. 이후 밀양경찰서 폭파, 조선총독부 청사 폭탄 투척 등으로 이어졌고 일제가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