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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면 3·1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720
한자 鐵馬面三-一運動
영어의미역 March 1st Movement at Cheolma-my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중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김수찬|오덕근|정인준|김운일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10일연표보기 - 발생
발생|시작 장소 철마면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중산지도보기

[정의]

1919년 4월 10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4월 5일 기장면에서도 3·1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을 목격한 철마면민들은 이후 4월 8일과 좌천 장날인 9일, 또 기장 장날인 10일에도 대대적인 시위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에 김수찬(金守燦)·오덕근·정인준·김운일 등이 중심이 되어 철마면에서의 거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경과]

거사일은 기장 장날인 4월 10일로 하고 주민들과 와여리 중산에 모여 선언서를 낭독한 후 기장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한다는 구체적 안까지 정하였다. 주도 인물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김운일은 독립 선언서를 구하기 위해 정관면기장면으로 갔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궁리 끝에 김운일의 형수에게 부탁하여 친정인 교리에서 기장면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김수룡으로부터 등사한 독립 선언서 1부를 구하였다. 김수찬·오덕근·정인준·김운일 등은 장전리 교회와 사랑방, 곰터, 유금터 등에서 독립 선언서를 필사하는 등 시위를 준비해 갔다.

그리고 김운일은 정인영·김재규·김재선 등과 4월 8일 기장면 시위에도 참가하였다. 이 시위에서 김운일은 일경에게 체포당하여 부산으로 압송되어 가던 중 대변리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다시 철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4월 10일의 거사일이 이미 일본 경찰에게 알려짐에 따라 감시가 심해져 거사 일정을 진행하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주도 인물들은 와여리 중산에 모여, 위험을 무릅쓰고 예정대로 거사를 시작하였다. 이에 마을 청년 20여 명도 시위에 동참하였다.

[결과]

시위가 진행되자 미리 숨어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일경들이 시위 군중을 포위하고 주도 인물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주도 인물들은 철마면의 거유(巨儒)였던 오덕근의 노력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의의와 평가]

철마면의 3·1 운동은 기장면 3·1 운동에 영향을 받아 진행되었다. 그리고 기장면과 연계 하에 시위를 진행하고자 한 모습을 통해 다른 지역과의 연계를 통해 시위를 확장해 나가는 3·1 운동의 한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철마면 3·1 운동을 통해 나타난 항일 의지는 이후 1920년대 지역 항일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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