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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662
한자 金正俊
영어음역 Gim Jeongjun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신학자|목회자
성별
대표경력 한신대학교 학장
출생 시기/일시 1914년 11월 6일연표보기 -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943년 - 목사 안수
수학 시기/일시 1928년 무렵 - 호신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40년대 초 - 연희전문학교에 편입
수학 시기/일시 1940년대 초 - 일본 아오야마학원에서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40년대 초 - 일본 청산신학원에서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50년대 초 - 캐나다 빅토리아대학의 임마누엘학교와 토론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58년 - 영국 에딘버러대학에서 신학 연수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불국사교회 목회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5년 무렵 - 자인읍교회에서 목회 사역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15 직후 - 미군 통역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6년~1948년 - 폐결핵으로 마산 요양소에서 요양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조선신학교 교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성남교회 담임 목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한신대학교 교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한신대학교 학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3년 - 연세대학교 교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70년 - 한신대학교 학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81년 2월 3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학교|수학지 호신학교 - 경상남도 창원시
학교|수학지 숭실중학교 - 평양직할시
학교|수학지 숭실전문학교 - 평양직할시
학교|수학지 연희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청산학원 - 일본 도쿄
학교|수학지 청산신학원 - 일본 도쿄
학교|수학지 빅토리아대학의 임마누엘학교 - 캐나다
학교|수학지 토론토대학교 신학대학원 - 캐나다
학교|수학지 에딘버러대학 - 영국
활동지 불국사교회 - 경상북도 경주시
활동지 자인읍교회 - 경상북도
활동지 조선신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한신대학교 - 경기도 수원시
활동지 연세대학교 - 서울특별시

[정의]

부산 지역에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민중 신학 연구에 헌신한 신학자이자 목회자.

[활동 사항]

김정준(金正俊)[1914~1981]은 1914년 11월 6일 부산의 궁벽한 산골인 금정구 금성동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누룩을 만들어 팔아 겨우 먹고 살았으며, 쌀밥은 설날과 추석에만 구경할 만큼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김정준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김정준의 신앙은 어머니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1928년 무렵 김정준은 어머니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호주 장로교 선교사의 장학생이 되어, 마산의 호신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학한 지 일 년이 지났을 때 호신학교는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 학생 운동의 여파로 폐교되고 말았다. 때마침 호신학교에서 일어난, 일본인 선생을 배척하는 동맹 휴학이 빌미가 되었다.

김정준은 낙담하고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1930년대에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으로 다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김정준은 숭실중학교에서 평생의 스승이 되는 송창근(宋昌根)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중학교 과정을 이수한 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나 숭실전문학교 역시 신사 참배 문제로 폐교되고 말았다.

1940년대 초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편입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평생의 반려가 될 주재숙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총력전에 돌입하였고 조선인 학생들을 강제 징집했으며, 학교를 군용 시설로 사용하였다. 연희전문학교가 대동공업전문학교로 바뀌자, 김정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과 청산신학원에서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28세가 되던 해인 1942년 3월 10일에 김천의 황금동교회에서 주재숙과 결혼하였다. 다음 해인 1943년 목사 고시에 합격, 목사 안수를 받고 불국사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불국사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2년 동안 매일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며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 그 후 김천 황금동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송창근 목사의 부름을 받아 경상북도 자인읍교회에서 4개월 동안 목회 사역을 하였다.

8·15 광복이 되고 나서는 황금동교회의 목회를 도우며 미군의 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격무와 과로 탓인지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1946년에 쓰러져 마산 요양소에 입원하게 되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마산요양소에서 병을 치료한 후, 1949년 조선신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성남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지인들의 도움으로 캐나다로 가서 빅토리아대학교[University of Victoria]의 임마누엘학교와 토론토대학교[University of Toronto]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1958년 영국 에딘버러대학[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신학 연수를 하였다. 구약 연구로 학위를 받은 김정준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1960년 한신대학교 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61년에는 한신대학교 학장이 되어 학문과 경건에 힘썼으나, 필화 사건에 몰려 학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연세대학교의 신학 교수와 교목 실장 등으로 일하며 한신대학교를 떠났다가, 1970년 4월 한신대학교 제8대 학장으로 초빙되어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김정준은 삼선 개헌과 유신 통치의 격동기에 동료 교수들과 함께 인권과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독재 정권에 맞서는 싸움을 하였으며, 이 투쟁을 통하여 한신대학교는 민주화의 요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정준은 개인적으로 이 싸움을 단순히 민주화투쟁이 아닌, 신앙 운동이자 예수 운동으로 인식하였다. 독재 정권과의 기나긴 싸움에서 건강이 악화된 김정준은 1976년 학장직을 사임하고 평교수로 근무하였다. 이 기간에 김정준은 성서 속에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즉 민중에 대한 성서의 관심을 발견하고 민중 신학의 초석이 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1981년 2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사상과 저술]

저서로 『삶에 이르는 병』[대한기독교서회, 1972], 『시편 명상』1·2[대한기독교서회, 1978], 『시편 명상』3[대한기독교서회, 1979], 『시편 명상』4[대한기독교서회, 1980], 『역사와 신앙』[한국신학연구소, 1987], 『율법서 예언서 연구』[한국신학연구소, 1988], 『신학 논단 신학 수상』[한국신학연구소, 1991], 『정의의 예언자』[한국신학연구소, 1991], 『구약 성서의 이해』[평민사, 1991], 『시편 명상』5[한국신학연구소, 1992], 『폰 라드의 구약 신학』[대한기독교서회, 2001] 등이 있으며, 공저로 『구약 성서 개론』[대한기독교서회, 1990]을 남겼다.

[참고문헌]
  • 민중신학연구소(http://www.minjungtheolog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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