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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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鎭達 |
영어음역 | Seo Jindal |
이칭/별칭 | 도풍(稻風)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영준 |
[정의]
부산광역시에서 활동한 서양화가.
[활동 사항]
서진달(徐鎭達)[1908~1947]은 190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호는 도풍(稻風)이다. 부산으로 와서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3년 동안 미술 연구소에서 수학하였다. 1935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고바야시[小林萬吾] 등에게 인상주의와 아카데미즘이 절충된 조형어법을 배웠다. 1931년에는 제10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시장의 일각」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미술 연구소와 미술 학교 재학 중에 조선 미술 전람회에 여섯 차례나 출품하여 「소녀 탄주도(彈奏圖)」·「인물」·「나부(裸婦)」·「스토브」 등이 입선하였다. 「왼손을 입에 댄 나부」[1937]·「등을 보이고 있는 나부」[1938] 등을 보면, 대상에 충실하면서도 강한 붓 자국과 명암 대비를 잘 표현하였다. 특히 서진달은 나체화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1940년 제3회 재동경 미술 협회전에 「정물 A」·「나부」 등 9점을 출품하였다. 1941년부터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하면서 변종하·김창락·추연근·백태호·김우조 등을 가르쳤다. 이후 인천의 소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42년 중국 둥베이[東北]로 가서 하얼빈공과대학 강사를 지내면서, 1943년 개인전을 열었다. 8·15 해방 후에는 부산에 정착하여 미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하지만 가정 파탄으로 무질서한 생활 속에 방황하다가, 1947년 결핵에 걸려 4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1948년 대구 공회당에서 유작전이 열렸다.
제16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출품된 서진달의 작품 「실내」를 본 이광수가 “황의의 조선 여성과 조선식 청동화로를 통하여 소위 조선적 정서를 영묘하게 표백(表白)했다.”고 말한 데 대해 김복진은 매섭게 비판하였다. 김복진은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되풀이되는 ‘조선적’, ‘향토적’, ‘반도적’이란 낱말은 결국 지나가는 외방(外方) 인사의 촉각에 부딪치는 ‘신기(新奇)’·‘괴기(怪奇)’에 그칠 따름이다.”라며, 결국 미술의 본질을 말살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향토색 논쟁을 촉발시키기도 하였다.
현재 국립 현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나부」는 일본 여성을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당시 일본 미술계를 풍미했던 야수파적 경향을 보여 주었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강하게 대비시킴으로써 화면을 역동감 있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며, 세잔[Cézanne]에 심취했던 그는 인물화뿐만 아니라 대담한 구도와 활달한 붓질이 두드러진 풍경, 정물에서도 세잔의 조형 요소를 도입하였다.
[저술 및 작품]
대표 작품으로 「왼손을 입에 댄 나부」[1937]·「등을 보이고 있는 나부」[1938]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조선 미술 전람회에 6차례에 걸쳐 입선하였으며, 1948년에 대구 공회당에서 유작전이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