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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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基秋 |
영어음역 | Gim Gichu |
이칭/별칭 | 백봉(白峯)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대로 777[부전동 50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나철회 |
[정의]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승려.
[활동 사항]
김기추(金基秋)[1908~1985]의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190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백봉(白峯)이라는 별칭을 썼다. 10세까지 제주도에서 자라던 김기추는 11세에 부산으로 이주하여 영도소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제2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부산제2상업학교 시절 김기추는 조선사를 교과목에 포함시킬 것, 일본식 학교 이름을 우리말로 바꿀 것, 일본 현역 군인의 출장 군사 교육을 폐지할 것 등을 요구하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투쟁이 학교 밖까지 확산되고 집단적 소요가 거세어지자 학교 당국은 김기추를 퇴학시켰다.
1920년대 중반에 김기추는 25세 이하 청년들로 구성된 청년 동맹에 가입하여 민족의 대동단결과 독립에 힘을 기울였으며, 청년동맹위원장의 직위를 맡기도 하였다. 이후 김기추는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행상을 하는 한편 1927년 신간회(新幹會)와 관련하여 은밀히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김기추는 1928년 초 사상범 일제 검거 때 체포되어, 「치안 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7월 2일 일제의 만주 침략 음모인 만보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김기추는 격분하여 부산의 중국 음식점 동반루를 부수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 형사들에게 쫓기어 만주로 도피한 김기추는 박대좌라는 한국인 장교 밑에서 서생(書生) 노릇을 하며 도피 생활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간부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미군정청에 법령 위반으로 구금을 당하여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이때 수감된 상태에서 『채근담(菜根譚)』과 『벽암록(碧巖錄)』을 읽고 인생 문제에 회의를 느끼게 되면서였다. 이에 1963년 대전의 심광사(心侊寺)에서 도반들과 선(禪) 수행의 결사를 맺고 출가하여, 7개월 만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1969년 김기추는 대의(大義)의 요청으로 심광사에 머물르며 『금강경(金剛經)』과 『유마경(維摩經)』을 강의하였고, 1972년 부산으로 거처를 옮겨 금정사(金井寺)에서 강의하는 등 재가불자의 선 수행 포교(禪修行布敎)에 힘을 기울였다. 같은 해에 부산광역시 수영구 남천동 산 중턱에 보림선원(寶林禪院)을 설립하여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984년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극동 마을로 이전하였다. 1985년 여름 선 수련회를 열어 철야 정진을 주관하다가 8월 2일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김기추는 생전에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금강경 강송(金剛經講頌)』·『유마경 대강론(維摩經大講論)』·『선문 염송 요론(禪門拈頌要論)』·『백봉 선시집(白峯禪詩集)』·『절대성과 상대성』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보림선원에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