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5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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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應九 |
영어음역 | Lym Eunggu |
이칭/별칭 | 이토 오큐[伊藤應九]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선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최초의 일본 유학 서양화가이자 친일 미술가.
[활동 사항]
임응구(林應九)[1907~1994]는 1907년 9월 13일 부산부 대신동 576-2번지[현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일본을 오가며 일본 화가 오카다 사브로스케[岡田三郞助]에게 배웠고, 1928년에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부산 지역 최초로 일본에서 그림 공부를 한 유학생이었다. 1928년에 제7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우에노 공원」으로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1934년 제13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주금(奏琴)」으로 특선하였고, 다음해 제14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준자상(俊子像)」이 감사(監査) 없이 특선하였다. 1936년 제15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여인 좌상(坐像)」이 역시 무감사 입선하고, 1937년 제16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아코디언」, 1939년 제18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부인(婦人)」, 1941년 제20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흰 옷 입은 여자」가 입선하여, 모두 7차례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입선하였다.
1933년 부산일보사[현 『부산 일보』와 관련 없음] 전시장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36년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처가에 입적하면서 일본에 귀화하고, 이토 오큐[伊藤應九]로 창씨개명하였다.
임응구의 작품 경향에 대해서는 서양의 고전적 양식을 따랐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첫 개인전에 나온, 서양 머리를 하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이르는 것이다. 임응구의 이력은 1930년대에서 1940년대의 일본 서양화의 한국적 영향이나 경향을 알아볼 수 있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1939년 작품인 「어머니와 아들」은 식민지 체계가 요구하는 어머니 상을 구현한 것이다.
1943년 2월에 친일 미술인들이 결성한 단광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단광회는 국가주의적 성격이 강한 미술 단체로 일본인 서양화가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가 주도하고 김인승·심형구·김만형·박영선·손응성·이봉상·임응구 등 조선인 7명과 일본인 화가 12명이 모여 19명의 회원으로 조직되었다. 임응구는 징병제를 지원하기 위해 단광회가 제작한 관제 미술 작품 「조선 징병제 실시 기념화」이라는 기록화 공동 제작에 참여 하였다. 「조선 징병제 실시 기념화」는 징병에 나선 청년을 중심으로 그를 배웅하는 일본인과 친일파 등 실존 인물을 그려 넣어 전쟁에 임하는 미술인의 결전 의지를 다지는 것이었다. 이는 제작에만 여러 달이 걸린 대작으로, 4월에 열린 제1회 단광회 회원전에서 공개되었다. 이후 징병제 분위기를 고취하고자 순회공연으로 전시되었으며, 전시가 끝난 6월 14일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기증되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임응구는 일제로부터 조선총독부상을 받기도 하였지만, 동일한 이유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 인명 사전』에 친일파로 이름을 올렸다. 해방 후 임응구는 일본에서 활동하며 제국 미술전에 수차례 출품하여 특선을 하는가 하면, 백수상(白壽賞)을 받았다. 봄에 열리는 문부성 전람회에 12차례 입선하였고, 살롱 드 오톰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60세가 넘은 나이에 일본 문부성 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고 전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활동하며, 일전회우(日展會友)를 지냈고 살롱상도 받았다. 1994년 사망하였다. 사진작가 임응식(林應植)이 그의 동생이다.
[저술 및 작품]
「우에노 공원」[1928], 「교외」[1930], 「준자상」[1935], 「여인좌상」[1936], 「부인」[1941] 등의 작품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